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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트리오’ 정경화·명화·명훈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가 남긴 위대한 유산
‘정트리오’ 정경화·명화·명훈 어머니 고 이원숙 여사가 남긴 위대한 유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6.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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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 자식들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신뢰는 우리 남매에게 최대의 자산이었다”(정명훈)

 

“신장이 안 좋아서 투석을 해오셨어요. 5개월 정도 입원했는데 차츰 상태가 안 좋아지셨죠. 올해로 아흔세 살인 어머니는 아주 편안하게 돌아가셨어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맏아들 정명근 CMI 대표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 대표는 “특별한 유언은 없었다”면서도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세상의 좋은 말들은 모두 해주셨다”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원숙 여사는 지난 5월 15일 밤 11시 47분께 향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한때 교사 생활을 했던 그이는 6·25전쟁 이후 서울 명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자녀들의 음악교육을 뒷받침했다. 미국으로 이민 간 후에는 워싱턴 대학가에서 한식당 코리아하우스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이는 플루트 정명소, 클래식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는 정명근 CMI 대표,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전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정명철, 지휘자 정명훈, 의사 정명규 등 일곱 자녀를 세계적인 리더로 키워냈다. 그이의 빈소에는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정명소·명철을 제외한 다섯 명의 자녀들이 함께했다.

어머니의 장지에서 추모공연 여는 다섯 남매
이원숙 여사의 발인식이 있던 날. 어머니의 빈소는 아들 정명훈이 지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정명훈의 셋째 아들 정민이 함께 앉아 있었다. 첼리스트 정명화는 입구에서 남편과 함께 문상객을 맞았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남편의 팔을 꼭 잡는 정명화의 마른 몸이 더욱 가냘파 보였다.
이윽고 발인 예배가 시작됐다. 세계적인 음악가를 길러낸 그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시향 금관오중주의 연주가 울려퍼졌다. 예배는 평소 종교적인 우정을 쌓아오던 서울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의 집례로 진행됐다. 예배가 끝날 무렵 정명근 대표는 문상객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지만 목이 메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정경화·명화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훔쳤고, 막내 정명규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명훈은 그저 조용히 아들 정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명화는 한 인터뷰에서 “한 달 전 경화가 중환자실에 있는 엄마 뺨에 입을 맞췄더니 의식이 없는데도 엄마가 방긋 웃었다. 그게 마지막 웃음이자 유언이 됐다”며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자녀들의 음악을 들으며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정명화의 남편 구삼열 서울관광마케팅 대표는 “목표를 정하면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지만 자녀들에게만큼은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었다. 이들을 길러낸 건 결국 사랑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정명훈은 “어머니는 나의 음악 인생 50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며 “자녀들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신뢰는 우리 남매에게 최대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원숙 여사의 장지는 미국 뉴욕 퀸스 공동묘지에 마련됐다. 그이의 소원대로 1980년에 세상을 뜬 남편 곁에 묻히는 것이다. 그이의 자랑스러운 다섯 명의 자녀들은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장지에서 세상에서 한 번밖에 없을 음악회를 연다. 아마 그이는 하늘나라에서 자녀들의 연주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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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남매 재능 찾아준 고 이원숙 여사
영원히 기억에 남을
아주 특별한 자녀 교육법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길러낸 그이는 ‘장한 어머니’로 널리 알려졌다. 자녀 교육을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친 그이는 미국에서 식당을 운영할 당시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남편과 함께 직접 청소와 주방일까지 했지만 자녀들의 공연 관람을 위해서는 수백 달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이는 오랜 세월 자녀 교육의 신화로 불렸다. 자신의 교육 노하우를 담은 책 <너의 꿈을 펼쳐라>, <통 큰 부모가 아이를 크게 키운다>는 많은 부모들의 스테디셀러가 됐다.
이원숙 여사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생전 자신의 표현처럼 ‘억척’스러웠다. 그이는 자녀들이 가진 재능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뒷받침했다. 그이의 교육철학은 ‘소질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진로를 정하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정명화는 “어머니는 아이들 각자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개성에 맞춰 서로 다른 악기를 쥐어주셨다”고 기억한다. 정명훈은 “어머니는 기다리는 데 명수였다. 나는 두 살부터 발레, 노래까지 안 해본 게 없다. 그러다가 피아노를, 지휘를 하겠다고 결정할 때까지 어머니께서 기다리셨다. 내가 본 최고의 교육 전문가다”라고 말했다.
그이는 단 한 번도 자녀들에게 부모의 욕심을 강요하거나 조바심으로 다그친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연주 실력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던 정경화는 유럽에 데뷔해 승승장구하던 1970년대 연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다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그이는 “사람이 먼저다. 네가 힘들면 당장 그만두자”라고 말해주었다. 이윽고 자신이 진심으로 바이올린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정경화는 더욱 연습에 매진하며 세계적인 연주가가 됐다.
그이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자녀들의 연주가 열릴 때면 가방 속에는 못과 망치가 들어 있었다. 연주회장에 일찍 도착해 객석을 일일이 점검하기 위해서다. 혹시 연주 중 삐걱대는 소리가 날까 봐 걱정했던 것. 그이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녀들 정서 위해 음악교육 시켜

이원숙 여사가 자녀들에게 음악교육을 시작한 건 광복 직후였다. 당시 서울의 한 시장에서 국밥 장사를 했던 그이는 가게에 오가기 편하도록 집도 시장 근처에 마련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낼수록 혼잡한 시장 환경이 아이들에게 이로울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여섯 살, 다섯 살, 세 살이던
명소·명근·명화가 혹 거칠게 자라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그이는 자녀들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루 종일 왁자지껄한 시장 소음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선율만 한 정서교육도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어려운 살림을 쪼개 야마하 피아노 한 대를 가까스로 빌린 후 정명소·명근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키기 시작했다. 레슨비에다 피아노를 빌리기 위해 꾸어온 돈의 이자를 갚느라 그이는 시장에서 남이 입는 치마를 사다가 구멍이 나도록 입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되도록 자주 음악을 접하도록 하기 위해 레슨 선생을 매일 오도록 했다. 그러던 얼마 후 6·25가 터졌고 가족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이는 전쟁으로 레슨을 중단시켜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한창 음악에 재미도 붙이고 재능도 발견하던 참이었는데 여기서 중단했다가는 자칫 흥미를 잃거나 음악을 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몇 년씩 뒤처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그이는 피난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피아노만은 싣고 가기로 했다. 가족과 함께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그이는 우여곡절 끝에 가져온 피아노를 집 안에 들여놓고 아이들이 마음껏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이는 부산에서 네 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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