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9:25 (금)
 실시간뉴스
광대, 다시 무대에 오르다 전 문광부 장관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 김명곤
광대, 다시 무대에 오르다 전 문광부 장관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 김명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6.17 0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꽤 오래전부터 김명곤이라는 이름은 배우로, 또 문화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많은 이들에게 각인돼왔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영화 <서편제> 이후 국립중앙극장장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두루 거치면서 한동안은 스크린과 무대에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몇 해 전 역사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잠깐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반가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전주세계소리문화축제 조직위원장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그가 최근 뮤지컬 <까르페디엠>을 통해 다시 무대에 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려 10여 년도 넘는 시간을 돌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한 사람의 배우로 돌아온 그. 게다가 뮤지컬은 처음이란다.

세월이 더할수록 짙어지는 감성
이름 모를 곡이 휘파람으로 연주되는 휴대전화 컬러링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하는 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움이 앞섰다. 연출가나 극작가가 아닌 배우로서 무대를 접하는 소감과 영혼의 자유로움이 배어 있는 삶의 철학을 쏟아놓는 그와의 유쾌한 대화…. 푸른 봄의 가운데서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을 이어가는 남자의 꿈과 마주한 순간, 그에게서 소년을 발견했다.
“그동안 연출가로서 작품활동을 꾸준히 한 덕에 무대가 낯설지는 않아요. 그래도 오랜만에 이런 기회를 통해 연기하게 되니까 굉장히 즐겁고 설레네요. 물론 조금 어색한 부분도 있죠. 그렇지만 제 시작이 배우이기에 고향에 온 기분이랄까요. 역할의 비중이나 공백기간이 길고 짧은 것을 떠나 다시 여러 배우들과 어울려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저를 새롭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까르페디엠>은 ‘현재에 충실하라,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라틴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한국 현실에 맞게 재창작한 이번 공연은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속에서 청소년들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고뇌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경쟁과 입시 위주의 혼탁한 현실 속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배우로서는 물론 전직 장관으로서도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 중에는 프로가 아닌 현직 교사들도 있다. 청소년을 위한 공연이라는 취지에 걸맞는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 그의 의욕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과의 감정적 교류다. 비록 세월 탓에 나이 먹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해도 감성만은 늙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세대에 속한다, 나이가 몇이다’라는 식으로 규정해본 적은 없어요. 작품을 구상하고 끊임없이 소재를 찾다 보면 계속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와 영화, 드라마를 많이 접하게 되죠. 예술을 하는 입장에서 낡은 사고방식과 감성은 계속해서 깨뜨려나가야 할 것들이에요.”
최근 한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대중을 사로잡은 임재범의 노래는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운전하고 가다가 백지영이 부른 이름 모를 노래를 듣고 울컥하는 심정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후에 그 노래를 작곡한 프로듀서 방시혁을 직접 수소문해 만나기도 했다며 웃음 짓는 그. 예술에 대한 생각을 교류하는 데 있어 나이나 체면치레 같은 것은 그에게 해당사항이 아닌 듯했다.      

꿈을 좇아온 인생
한 가지에 안주하지 못하고 도전을 즐기는 성격 탓에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참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가슴속에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한 가지 꿈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성적인 것도 있겠죠(웃음). 끊임없는 변화에 제 몸을 맡겼다고 할까요.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살아가는 것은 제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강물을 타고 흘러가듯 가다가 머물러서 때론 호수가 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폭포로 변하기도 하죠.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스타일이에요. 앞으로의 인생이 또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죠. 그렇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하나같이 제가 추구하는 꿈을 좇으며 살아왔다고 자신합니다.”
사실 언뜻 보면 그는 삶을 그리 계획적으로 살아오지 못했다. 여러 가지 우연이 만나 작은 물줄기가 됐고 흐르다 보니 어느새 깊이와 폭이 넓어지며 커다란 강줄기로 변한 것과 같은 삶이었다. 그러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우연은 운명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학교 때 친구 따라 연극반에 놀러 갔다가 대본 읽는 것을 도와줬더니 다음부터 나오라고 해서 저도 모르게 인연이 됐어요. 판소리도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국악원 구경을 갔다가 접하게 됐고…. 아리랑 극단을 창단하고 꾸려오면서 배우만이 아니라 극단 대표로서, 제작자와 연출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요. 그러다 <서편제>를 만나게 됐고요. 그것도 참 우연이었죠(웃음). 전혀 흥행 가망이 없는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해서 동참한 것이 인생의 갈림길이 됐으니까요. 국립극장장을 한 것도 계획이 있었다기보다 어느 날 신문에 난 공고를 보고 지원하니 덜컥 임명이 된 것이고요. 어떤 목표를 세우기보다 배우든 연출이든 작품에 대한 꿈이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게 한 것 같아요.”
그의 삶은 꿈을 꾸는 이에게는 한없이 행복한 인생이었지만,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했다. 오래전 서울대 출신의 고등학교 교사라는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을 뒤로하고 선택한 연극배우의 삶은 당시로서는 말 그대로 ‘가난과 벗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그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사를 그만둘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죠. 그러나 그때 이미 전 단순히 연극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 것이에요. 물론 그때 남들이 들으면 망상가에 다름없었지만…(웃음). 단 한 번도 스타가 되겠다거나 돈을 벌겠다는 목적은 없었어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연습하고 고민하는 매순간이 행복에 겨웠죠.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해온 극장장이나 장관, 축제위원장 같은 일들도 단순히 직을 맡는 데 의미를 두기보다 그것을 통해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고자 한 것이고요.”
그가 지내온 세월 동안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발전은 눈부셨다. 그러나 균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연극계는 여전히 어렵고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도 엿보인다. 그 스스로도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영화였지만 배우의 기본은 관객과 함께 숨쉬는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변함없는 믿음이다.
“제가 영화를 처음 했을 때만 해도 연극배우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희귀했죠. 일종의 용돈 벌이식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어요. 이제는 예전과 정반대의 상황이 된 셈이죠. 연극배우로 삶을 지속하기 위해 영화에 출연했다면, 이제 연극은 영화나 TV 출연을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듯해요. 연극은 배우의 기본을 배우는 곳이고 알파와 오메가가 그 속에 존재합니다. 대중예술이 더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기초가 튼튼해야죠. 그러나 요즘의 풍토는 걱정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4년여, 그는 쉼 없이 꿈을 좇으며 살아왔고 오랫동안 구상해온 여러 가지 일들을 조만간 현실화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안에 그간 집필해온 저서를 출간할 예정이고, 뮤지컬 공연 연출과 영화감독의 꿈도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가족이 있어 가능했다
그가 한결같이 꿈을 위해 살아올 수 있었던 데는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준 가족의 힘이 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