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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음악의 힘 첼리스트 송영훈의 매력에 빠지다
거부할 수 없는 음악의 힘 첼리스트 송영훈의 매력에 빠지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6.1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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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음악을 들을 때면 햇살 좋은 날 풀숲을 걷는 느낌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악기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환희에 차게 만들기도 한다. 첼리스트 송영훈의 음악은 쉼표이다. 일상에 지친 어느 날 첼로 선율에 귀를 맡기는 것만으로 휴식이 되니까.
그는 클래식계 스타다. 2009년 불황이던 공연계에서 이례적으로 매진사례를 이뤘던 공연의 주인공이자, 지난해는 가수 비와 모 백화점 CF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프로필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스타’로 기억되기보다 ‘음악인’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바람에서다. 사람들과 일상의 일들을 나누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신이 날 때는 음악 이야기를 할 때고 이보다 더 좋아하는 건 첼로라는 악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다. 그런 그가 6월 세 남자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매년 가을에는 제 음악세계를 펼칠 수 있는 독주회 투어를 하고
5, 6월에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요. 6월 공연 <송영훈의
4 첼리스트 콘서트>도 재미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죠. 이번 공연에서는 첼로만으로 앙상블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첼리스트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죠.”
<송영훈의 4 첼리스트 콘서트>는 관객들에게 선물을 주는 기분으로 준비했다. 관객들이 선물 포장지를 뜯을 때의 설렘, 받았을 때의 기쁨을 오롯이 느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욕심 많던 어린 시절의 빛이 되어준 가족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꾸준히 협연하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송영훈은 아버지가 비올리스트인 음악가 집안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음악적 재능이 보이는 아들에게 음악을 강요할 법도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 입에서 “연습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아들의 하루 스케줄을 매일 짤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그의 의견을 누구보다 존중해주었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 그에게 실패를 맛보게 할지라도 그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런 어머니는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부모님 따라 음악회를 많이 갔어요. 물론 그때부터 첼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때는 음악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거든요. 만약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강요하고 연습을 시켰다면 저는 음악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다행히 부모님은 제가 자연스럽게 음악을 좋아하고 또 하고 싶게끔 만드셨죠.”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첼로를 잡았다. 사실 그가 첼로를 시작한 데는 형의 영향이 컸다. 형은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송정훈이다. 형이 바이올린을 시작하자 어린 시절 욕심이 많았던 그는 형보다 더 큰 악기를 하겠다며 첼로를 선택했다. 만일 콘트라베이스를 먼저 알았더라면 자신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되었을 거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
첼로를 시작한 이후 한국일보 콩쿠르, 이화경향 콩쿠르 등 한국에서 치를 수 있는 거의 모든 대회에서 1위를 했다. 열한 살 때 서울시향과 협연하며 ‘음악신동’으로 불린 그는 예원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들어갔고,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차밍 로빈스 선생을 만났다.
“차밍 로빈스 선생님은 제게 아버지 같은 분이세요. 선생님을 만났을 때 아버지가 살아 계셨는데 저에게는 미국 아버지와 같았죠. 음악만 가르쳐주신 게 아니라 ‘옷은 어떻게 입어라’,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이렇게 해라’부터 무대 매너까지 꼼꼼히 가르쳐주셨어요. 심지어 양말 색깔까지 신경 써주셨죠. 그분이 저에게는 첼로였고, 음악을 하는 이유였어요.”
92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기 위해 힘썼던 선생은 임종 직전 그가 영국 노던 왕립음악원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미국에서 줄곧 형과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지내왔던 그에게 영국행은 인생에서 처음 하는 홀로서기였다.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연습해
한국과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시련은 이때부터 찾아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럽을 찾았지만 자신의 연주에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던 것. 어릴 때부터 콘서트나 음악회를 통해 들어온 ‘귀’가 있으니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아무리 해도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유럽에 가서 저보다 수백 배 잘하는 첼리스트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어요. ‘저런 음악이 있구나, 저게 음악이구나,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욕심이 생겼죠. 그리고 제가 들은 만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그때 스스로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평생 첼리스트로 살 것이고 아니면 포기하겠다는 강한 다짐을 했죠.”
그는 하루에 열 시간씩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했다. 스스로에게
‘미친 듯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좀처럼 실력은 향상되지 않았다.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에 낙심하며 ‘내가 왜 음악을 시작했나’라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게 됐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짐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저는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훌쩍 뛰어넘었어요. 아버지는 한국에, 저는 외국에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제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음식은 무엇을 잘 먹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죠. 저 역시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르고요. 제가 한국에 간 지 몇 개월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전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몇 개월 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죠. 아버지는 저에게 ‘좋은 재능을 받았으니 세상에 가서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게 너의 사명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어요. 원하는 연주 수준까지 오르지 못했으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8개월쯤 지났을 때 그는 정상급 젊은 연주자로 구성된 실내악단 세종솔로이스츠의 멤버가 돼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1년 6개월 후 핀란드 시벨리우스음악원에 들어갔다.
“연주하다 보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열망이 생겼어요. 그때 시벨리우스음악원의 아르토 노라스 선생님이 ‘나는 전 세계에서 다섯 명만 가르치는데, 나에게 지옥훈련을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죠. 지옥훈련을 한 후 첼로를 계속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 내리겠다고 생각하고 노라스 선생님 제자로 들어갔어요. 거기서는 처음 유럽에 왔을 때보다 더 열심히 연습했죠. 가끔은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요.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연습실에서 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연주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머릿속에서 그리던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양탄자를 타고 공중에 뜬 것 같은, 마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날부터 이제는 누가 뭐래도 첼리스트로 살겠다고 다짐했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생각에 잠겼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봐서일까.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매년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저의 변천사가 보여요. 매번 성숙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죠. 평생 첼리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숱한 어려움과 힘듦이 있었어요. 인생은 늘 탄탄대로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승승장구만 해온 줄 알거나, 갑자기 외국에서 온 스타로 생각해요. 저는 갑자기 혜성처럼 뜬 게 아니라 늘 여기에 있었어요. 크고 작은 연주들을 계속 해왔고,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기회가 닿으면 한국에 와 연주를 했죠. 그런 것들이 쌓여서 클래식 음악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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