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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꿈의 씨앗을 심다 최연소 고시 3과 합격한 공부비법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꿈의 씨앗을 심다 최연소 고시 3과 합격한 공부비법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7.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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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시라는 산이 한없이 높게만 보이지만 눈물겨운 인내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노력해서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

고승덕 의원의 지난 인생길을 돌아보면 이처럼 대단하고 화려한 이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스물두 살에 최연소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그 다음 해에는 행정고시, 외무고시에 연달아 수석과 차석으로 합격하는 등 믿기 힘든 신화를 이어왔을 뿐 아니라 유능한 변호사, 판사, 교수, 금융전문가, 국회의원 등 남들은 하나 이루기도 힘들다는 것을 척척 이루어왔으니 말이다. 혹자는 그를 타고난 천재라 할 수도. 그런데 이 모든 성공이 처절하면서도 눈물겨운, 온전한 자신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유난히 책을 좋아한 아이
1975년 유난히 교육열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난 고 의원. 의학박사에 전문의 아버지의 4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얼핏 고학력의 부모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6.25가 터지자 강원도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결혼을 해 고 의원을 포함한 네 남매를 낳은 아버지. 부양해야 할 식구도 많았고 그저 정직하게 번 돈으로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한 번도 넉넉하게 생활해 본 적은 없었다.
“제가 제주 고씨예요. 할아버지는 쭉 제주도에 사셨는데, 당시만 해도 제주도는 전라도에 속하는 섬이라 열악했죠.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발전이 안 됐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오직 자식들 교육을 위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와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신 겁니다. 저희 집안 교육열은 그렇게 할아버지 대부터 대단했어요. 부모님도 어려운 여건이지만 우리 4남매가 하는 공부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으려고 애쓰셨죠.”
요즘이야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한글은 깨치지만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고 의원 역시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 한글을 깨쳤고, 한글을 깨치면서 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책에서 배우는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뜬 그는 어머니가 사주시는 책을 비롯해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고. 누가 책을 보라고 억지로 시키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저 책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단다.
“할아버지께서 읽던 명작 수필집이나 동서양 소설 전집, 삼국사기 등 어른들이 보는 책은 물론 만화책까지 두루 섭렵했던 것 같아요(웃음).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불러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책에 푹 빠져 지냈죠.”
책을 그렇게나 많이 읽다 보니 나중에는 ‘기관지 알레르기’라는 병을 얻을 정도였다. 그 당시만 해도 종이의 질이 좋지 않아서 책장을 넘길 때 먼지가 많이 났는데 특히, 도서관에 있는 책은 더 낡은 것이 많아 몸에 안 좋은 먼지를 그대로 마시는 셈이 되어버렸던 것. 그나마 낮에는 알레르기 증상이 조금 호전되었지만 밤만 되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께서 병원을 개업 하셨는데, 따로 병원 자리를 구하지는 못하고 집 한쪽을 병원으로 사용했어요. 방이 부족해서 누나들은 작은 방에서 자고, 저와 동생은 부모님과 큰 방에서 생활했죠. 저의 기침소리에 온 가족이 잠을 못 이룰 정도였어요. 어머니는 어린 저를 안고 달래면서 밤을 새기 일쑤였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 낮에는 살림하시랴 밤에는 저를 달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돼서 어찌나 죄송한지 몰라요.”
또래 아이들처럼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그저 집 안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놀이를 대신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허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그. 아무래도 몸이 약하니 공부도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입학을 할 때도 때마침 중학교 입시가 없어져 추첨을 통해 중학교에 들어간 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말할 정도다.
“체력도 강해야 공부도 잘 할 수 있는데, 만약 제가 입시를 통해 중학교에 진학했다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웃음). 참 절묘하게도 제가 6학년이 올라갈 무렵 입시가 없어져 저는 당시 신설학교인 무등중학교에 입학하게 됐죠.”
무등중학교는 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등교할 정도로 광주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신설학교다 보니 체육시간에는 운동장 풀을 뽑는 일도 많았고, 반 친구들과 어울려 거의 매일 운동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하며 자연스레 운동을 많이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알레르기 증상도 거짓말같이 사라졌고 몸도 많이 건강해졌다. 중학교 1학년을 그렇게 열심히(?) 놀다 보니 어느덧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중학교 2학년이 됐고, 신생학교다보니 어느 학교를 가려면 어느 정도 커트라인이 되어야 하는지 선행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그저 열심히만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저는 막연히 우리나라 최고라는 경기고에 가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지방의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이 최고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고에 진학하겠다는 것은 사실 목표라기보다는 꿈에 가까웠죠(웃음).”
목표를 명확히 하고 난 후부터는 식구들과 함께 자는 방 한쪽에서 밤 늦게까지 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저녁 식사는 일부러 조금만 먹고 하루 수면 시간은 5시간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죽어라’ 공부만 했다. 결국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 서울의 한 기관에서 전국 중학생을 상대로 실시한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한 그는 경기고에 합격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등학교 입시에 반영되는 체력장. 물론 초등학교 때보단 체력이 많이 향상된 편이었어도 워낙 허약했던지라 체력장에서 우수한 점수를 맞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체육도 공부처럼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공부할 때처럼 악착같이 체력장을 대비한 연습(?)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혼자 운동장에 남아서 턱걸이를 하고 달리기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번에도 그의 노력은 어김없는 대가를 가져다줬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턱걸이를 하나도 못 하고 쩔쩔매던 허약한 학생이 턱걸이 20번 만점에 19번을 해내서 선생님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결국 그 대단한 노력과 의지력이 경기고 합격으로 이끌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 유일하게 살고 있던 혈육이 외숙이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지내던 외숙 집엔 이미 큰 누나가 얹혀살며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땅한 방법이 없으니 큰 누나와 함께 고승덕도 외숙 집 더부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생활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둘이나 친척 집에 맡길 수 없다며 명륜동 쪽에 조그만 한옥을 마련해 그와 그의 누나가 지내도록 했다. 덕분에 어머니는 광주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작은 누나도 돌보고 서울에 있는 남매도 돌보느라 서울과 광주를 왔다갔다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훗날 작은 누나가 이화여대 약대에 합격하면서 온 가족이 서울로 오게 됐지만 말이다.
“당시 서울에서는 서울이 아닌 곳은 전부 ‘시골’이라고 불렀어요. 경기고에서도 전교에 지방 출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들더라고요. 친구도 충남과 전북에서 온, 저와 같은 지방 출신이 전부였고요.”
그래도 학교 수업은 열심히 받았다. 교과목 중에서는 특히 영어를 좋아했는데, 1학년 때 혼자서 ‘정통종합영어’라는 책을 세 번이나 정독할 정도로 유독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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