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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 결혼식 조용히 치르고 남다른 행보 경기도지사 김문수ㆍ설난영 부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삶’
외동딸 결혼식 조용히 치르고 남다른 행보 경기도지사 김문수ㆍ설난영 부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삶’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7.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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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을 시집보내고 난 후 대부분의 부모는 허전함을 경험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평소 현장 중심의 행정을 근본으로 생각하는 탓에 그 어떤 정치인보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 때문. 넓디넓은 경기도 내 어느 곳에 소외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조금 더 찾아보고, 이야기를 듣는 일상은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에도 변함이 없다. 언제나 가정보다 공무에 더욱 신경을 쓰는 남편이지만 아내 설난영 씨 역시 평생 지켜봐온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응원군이다. 미싱공장 노동자에서 노조위원장, 3선의 베스트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의 경기도지사에 이르기까지…. 돌이켜보면 어쩜 그리 우여곡절 많은 삶이 있을까. 그러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는 속에서 부부에게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적어도 ‘나라를 위한다’는 신념 하나만은 변함이 없다. 힘없는 노동자의 편에서 시작해 이제는 경기도, 나아가 온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김문수 경기도지사 부부. 초여름 더위가 한풀 잦아든 오후, 도지사 공관에서 잠시 짬을 낸 부부와의 만남은 유쾌함과 진지함을 넘나들었다.

만감이 교차한 딸의 결혼식
김문수 도지사는 딸의 결혼식 전날까지도 중국과 필리핀 등을 돌며 신개념 초대형 쇼핑몰 유치와 경기도의 대중교통시스템을 수출하는 등 도를 위한 세일즈맨(?)으로의 일정을 소화했다. 덕분에 부모와 결혼 전 마지막 밤을 보내려던 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무뚝뚝한 그도 역시 결혼식 당일 부정(父情)은 감추지 못했다. “그저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돼서 기쁘다”며 덤덤하게 소감을 말하는 남편을 보고 아내 설난영 씨는
“시집가는 딸을 위해 바쁜 일정 중에 틈틈이 쓴 편지를 낭독했다”며 결혼식 때 발견한 남편의 또 다른 모습을 털어놨다.
“결혼식에서 아빠가 딸에게 주는 글을 써서 낭독하셨어요(웃음). 중간 중간 감정이 격했는지 울컥하는 모습이더군요. 그런데 폐백 때 또 다른 편지를 꺼내시더라고요.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언제 다 쓰셨는지… 결국은 두 번째에서는 목이 메는지 읽지 못하고 있어 제가 받아 읽어줬죠. 아빠가 그러니 딸도 울더라고요. 나중에 딸이
‘엄마는 딸 결혼식에서 울지도 않았다’며 타박을 주더군요. 저도 참 눈물을 감추려고 얼마나 애썼는데요. 남편 덕분에 저는 딸 결혼식에서 울지 않는 엄마로 기억돼 버렸네요(웃음).”
도지사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눈물의 이유는 알 듯하다. 한창 아빠의 존재가 소중했을 딸의 어린 시절 그는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며 여느 아버지와 같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핀잔에 그저 너털웃음으로 대신할 뿐이지만, 딸에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크다고 자신한다.
“마음이야 어느 아버지와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저 아버지를 믿고 씩씩하게 잘 커준 딸이 고마울 뿐이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친 제 바람대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또 사위 역시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여간 흐뭇하지 않더군요. 꽤 오래전부터 시집가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른 척하더니 글쎄 사위가 10년 가까이 만난 첫사랑이라 하더군요(웃음).”
그 역시도 가난한 시골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고학을 하며 힘들게 공부를 했던 젊은 시절이 있기에 사람을 보는 데 배경이나 직업을 중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금지옥엽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욕심(?)도 작용했을 법하다. 혹시나 한 질문은 역시 예상했던 답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지만, 성장 과정에서 고민을 들어주거나 하다못해 공부를 봐주지도 못해서 늘 미안했어요. 그런데 사윗감의 품성이 바르고 반듯하더군요. 처음 사위에게 돈을 보고 직업을 선택한다면 사회복지사는 힘들 거라고 했죠. 하지만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되는 사람인데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더 가치를 뒀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럼 된 거죠. 긍정적이고 참 성실해요. 사람이 돈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또 딸이 좋다고 하니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죠. 부모로서 다른 것은 몰라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방법만큼은 딸에게 물려줬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둘이 손잡고 함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 거라고 믿어요.”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부부는 30여 년 전 엄혹했던 순간의 결혼식을 떠올린다. 당시 상황으로 김 도지사와 아내는 정권에 의해 정화대상자로 분류됐었다. 군부독재 시절 노동운동에 헌신하던 시절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주례는 노조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기까지 한 사람이었고, 사회를 봐준 이 역시 다를 것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운 시절 참으로 소박하게 구색만 갖춘 결혼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식을 하는 것도 위장이 아니냐는 식으로 감시를 받을 때였죠. 혹시나 시위를 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탓에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어요. 우리 나름대로는 노동운동을 어떻게 성공하느냐에 골몰했던 시기였죠. 그에 반해 딸의 결혼식은 그런 정치적인 고민이나 갈등 없이 두 개인이 만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설계를 하는 시간이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부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손을 맞잡고 동시 입장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드러낸 것이다. 아내 설난영 씨 역시 여성의 지위와 노동운동가로서의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결혼은 여성에게 모든 사회활동의 끝을 의미했던 터라 남다른 고민이 깊었던 시기기도 하다.
“그때와 지금은 여성의 결혼에 대한 관념이 참 많이 달랐죠. 결혼은 그 이전에 무엇을 했던지 간에 종착점이었어요. 저 역시도 결혼을 하면서 이전에 해오던 활동이 단절되는 것을 경험했죠.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있던 입장에서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어요. 특히 저희의 경우 남편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제가 육아는 물론 생계까지 책임을 져야 했죠.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애썼어요. 결혼 생활과 일을 병행하며 지냈던 가장 치열하고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죠.”
설난영 씨는 당시 현장에서 물러난 여성 노조간부 출신들과 대학 출신 여성운동가들을 규합해 ‘한국여성노동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가정주부로서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모두 어린 자녀를 키우고 있던 상황에서 이전과 같이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한 고민이 깊었던 중 생각해낸 것이 바로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개념조차 생소했던 탁아소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이후 전국 각지 노동자들을 위한 10여 곳의 탁아소가 세워지는 시발점이 됐다. 어찌 보면 김 도지사 역시 지금까지도 보육과 육아정책에 높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 평생 신념을 따르는 삶을 살았던 덕분에 가족들에게 좋은 가장은 되지 못했던 김 도지사. 남편의 삶을 전적으로 지지해준 아내였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을 수 없다. 김 도지사 역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자부하지만, 딸을 시집보내면서 가족에게 힘든 삶의 무게를 지워준 것만큼은 미안함이 앞선다.
“저도 여성이니 보통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원하는 부분이야 있었죠. 가정적이고 아이 아빠로서 충실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해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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