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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 사촌 동생 잃은 개그맨 임혁필 본지에만 털어놓은 깊은 슬픔
충격,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 사촌 동생 잃은 개그맨 임혁필 본지에만 털어놓은 깊은 슬픔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8.1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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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던 날 임혁필은 방송 녹화를 위해 방송국에 있었다. 녹화가 끝나고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때 아내로부터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영문을 물으려는 찰나, 아내는 다급한 목소리로 사촌 동생인 이승렬 상병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3주 전 고모 내외가 면회를 갔을 때만 해도 건강했던 아이였다. 머릿속이 하얘지려는데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이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다.
“해병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고 네 명의 병사가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승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어요. 놀란 가슴을 안고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그날 오후 6시쯤 국군수도병원으로 달려갔죠.”
저녁 8시쯤 이 상병의 시신이 병원에 도착했다. 검정 비닐 팩에 싸여 있는 동생의 모습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렸다. 사건 현장 검증을 다녀온 이 상병의 부모님은 밤  9시 30분쯤 병원에 도착했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을 눈으로 확인한 부모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는 이 상병의 어머니인 고모의 얼굴을 보며 차마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련된 빈소에는 죽은 병사들의 영정 사진이 놓여 있었다. 해병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직후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승렬이는 아주 잘생기고 멋진 해병대의 모습 그 자체였어요. 고모는 아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펑펑 쏟으셨죠. 하지만 고모부는 이 모든 것을 애써 참으셨어요. 아마 자신마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셨을 거예요.”
이승렬 상병에게는 누나가 한 명 있다. 보통 남매들은 자주 싸운다고 하는데 이 상병은 생전 누나와 무척 친하게 지냈다. 이 상병의 누나는 때로는 오빠처럼, 남자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던 남동생을 잃은 슬픔에 먹지도 자지도 않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승렬이 누나의 눈물은 평생 마르지 않을 것처럼 흘러내렸어요. 저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동생을 잃은 누나의 절절한 슬픔이 전해져 마음이 더 아팠죠.”

스무 살 아들 그리고 동생을 잃은 가족의 슬픔
임혁필의 부모님은 8남매인데 이 상병은 그중 막내 고모의 아들이고 그와는 스무 살 차이가 난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른 채 그는     “승렬이는 대학에서 경호학과를 다녔는데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해 경호원이 꼭 맞겠다고 생각했던 아이”라며 다시금 사촌동생과 나누었던 잊을 수 없는 대화를 털어놨다.
“어느 날 승렬이가 저에게 찾아와 해병대에 자원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때 저는 ‘해병대는 좋은 곳이야. 남자라면 한 번쯤 갈 만한 곳이지’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말을 한 게 어찌나 후회스러운지 몰라요.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승렬이를 만류했더라면 저 서늘하고 어두컴컴한, 반 평도 안 되는 냉동고 영안실에 승렬이가 있지 않아도 될 텐데…’ 라는 죄책감도 들었죠. 그런 무거운 짐을 안고 고모와 고모부에게 다가가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어요. 두 분은 ‘네가 왜 미안해하느냐’며 오히려 저를 위로해주셨죠.”
국군수도병원에 머문 지 이틀째 되던 날, 염을 마친 이 상병을 만나기 위해 온 가족이 줄을 섰다. 가장 먼저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사촌동생(이 상병의 누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줄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았다. 고모와 사촌동생이 이 상병의 손을 붙잡고 놓을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다른 친지들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급기야 사촌동생이 극심한 슬픔과 탈수증세로 혼절을 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다행히 고모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임혁필은 고모부 역시 그 누구보다 아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상병과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삼우제 날. 죽은 장병들과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영결식장을 찾았다. 영결식은 해병대 장병에게는 최고 예우인 해병대장으로 치러졌다. 김관진 국방부장관과 김성찬 해군참모총장 등 군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1시간 정도 진행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직접 화환도 보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아들을, 동생을 잃은 슬픔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회의원도 와서 위로의 말을 전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승렬이를 대신할 순 없죠. 아마 승렬이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바라는 것이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거나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가거나 누나와 영화 한 편을 보는 걸 거예요. 하지만… 승렬이는 이제 그럴 수 없네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영결식이 끝나고 이 상병의 가족은 현충원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는 ‘살면서 대전에 가본 적 없는 승렬이가 이곳을 얼마나 낯설어할까’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동생을 땅에 그리고 가슴에 묻은 후 그와 이 상병의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동생 몫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
“현충원에 다녀온 날 새벽, 잠을 이룰 수 없어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인터넷은 유가족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사들로 뒤덮여 있었죠. 기사의 포커스는 해병대의 가혹행위에 있었고 매일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어요. 유가족의 아픔을 이야기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죠. 만약 자신의 동생이, 아들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럴 수는 없을 거예요.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따돌림을 시켜서 그 이유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요.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불명예스럽게 하늘나라로 보내고 싶을까요. 사람들의 반응에 화도 나면서 참… 안타깝더군요.”
온라인으로 해병대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나왔다. 해병대 출신인 그조차도 모르는 유언비어도 나돌았다.
“해병대가 육군이나 공군보다 군 생활이 힘든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군대 생활을 편하게 할 마음으로 해병대에 지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젊은 시절 고생 한 번 해보겠다는 각오로 올 수도 있고, 진정한 남자가 되어 보겠다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공통점은 힘든 군 생활을 각오한다는 거죠.”
20년 전 그는 병무청에서 치아 부정교합으로 3급 방위 판정을 받았다. 당시 그는 부모의 불화로 힘들어하던 중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부모 몰래 해병대 자원입대를 택했다. 어찌 보면 현실 도피를 위한 도구로 해병대를 선택한 셈이지만 힘든 생활 속에 배우고 깨달은 것도 많았다고.
“군 생활은 힘들었어요. 하지만 모르고 지원한 것도 아니었기에 꾹 참고 최선을 다했죠. 군 생활 당시 대대장님은 ‘진짜 해병대는 휴가 나갔을 때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 연병장에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을 때 줍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셨어요. 기초질서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해병대라는 말도 덧붙이셨죠. 모르는 사람들은 해병대가 미국의 델타포스처럼 공작활동을 하는 곳인 줄 알아요. 해병대에 오면 절대로 지지 않는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줄 착각하는 사람도 봤죠. 하지만 제가 해병대에서 배운 것은 참고 기다리는 법이에요.”
그는 제대 후 지금까지 해병대 정신을 잊은 적이 없다. 오랜 무명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닥쳤을 때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도 바로 해병대 정신이었다.
“얼마 전 이러한 마음을 담아 블로그에 긴 글 하나를 남겼어요.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죠. 제 울음소리에 잠을 깬 아내 앞에서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어요. 이번 사건 이후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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