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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리더 김은혜의 위대한 항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리더 김은혜의 위대한 항해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9.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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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를 비롯한 지면에서 그녀의 소식을 전하기는 공식적으로 3년 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은혜는 지난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대변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로 구설에 오르고 질타와 비판을 받는 엄중한 자리이다 보니 모든 것이 더욱 조심스러웠을 터. 오롯이 ‘대변인 김은혜’로만 살아가던 삶을 내려놓고, 지난해부터 ‘기업인 김은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그이의 마음도 어느덧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급기야 비까지 쏟아졌던 어느 날 만난 김은혜는 날씨와는 무관(?)하게 시종일관 건강한 빛을 반짝반짝 뿜어냈다. 그이를 따라다니는 모든 화려한 수식어를 잠시 내려놓고 마주한 ‘사람 김은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그이 앞에 놓여 있던, 은은하면서도 깊고 담백한 향의 아메리카노처럼.

겸손과 미덕을 갖춘 진정한 멘토
지난 5월, 김은혜는 아시아 소사이어티 코리아센터 주최 행사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과 함께 여성리더상을 수상했다. 청와대에서 대변인 생활을 하며 함께 맡았던 해외 홍보 업무성과를 인정받아 국제사회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한 설문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닮고 싶은 여성 1위로 선정될 만큼 그이는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이 시대의 여성 멘토로 꼽힌다. 하지만 그이는 여전히 겸손하고 소탈했다.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부끄럽다면서 금세 손사래부터 친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참 민망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지금껏 20년이 가까운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보다 훨씬 대단한 여성 리더들을 많이 봐왔거든요. 그런데 저에게 그런 과분한 상을 주신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웠어요. 저희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저 혼자 이루어낸 것은 하나도 없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뿐이죠.”
이렇듯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한 그이지만, 그이가 살아온 지난 길은 대단하고도 화려했다. 김은혜는 1993년에 MBC 기자로 입사, 그 후 약 15년 동안 굵직굵직한 사건 현장의 선두에 있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을 때, 구급대원 옷을 입고 무너진 건물에 들어가 삼풍백화점 설계도면을 입수, 부실공사로 인한 사고임을 밝혀냈다. 이 밖에도 지존파 사건을 최초로 특종 보도하고 기자로서는 최초로 여성 앵커로 발탁되는 등 기자로서 그녀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 후 MB정부가 출범하면서는 기자에서 청와대 대변인으로 변신을 시도, 약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라의 중대사를 전달하고 수렴하는 보좌관으로서 살아갔다. 사실 김은혜가 청와대 대변인이 된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그이가 정치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이 역시 실제로 정계 쪽에서 본격적으로 나랏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수차례 받았음을 고백한다.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선거 때마다 한 번쯤은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전국구 1번을 제의받은 적도 있고요. 제 입장에서는 저에게 과분한 여러 묵직한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했지만 당시 제가 저를 돌아봤을 때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권력 의지가 나에게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도 긍정적이지 않은 결론이 나왔고요. 그 자리는 저보다 먼저 그 길에 가 있고, 더 애쓰셨던 분들에게 돌아가야 합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듯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2010년 7월, 청와대 대변인 직을 사퇴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기자, 대변인 출신으로는 파격적으로 KT그룹 미디어전략실 전무로 영입된다. 다년간 언론계와 공직에 종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디어콘텐츠를 다루는 직무에 적합자라는 인정을 받은 것. 하지만 실질적인 기업인으로서의 경력은 전무한 김은혜가 KT에서 전무직을 맡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이는 잠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삐뚤어진 시선과 오해에서 비롯된 공격의 화살을 맞았지만 그이는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지금껏 저는 그날그날의 사건을 토대로 취재와 리포팅을 해야 하는 기자로서도 그랬고, 매일매일 대통령의 일정을 브리핑하는 대변인으로서도 그랬고 항상 단기 승부가 나는 일을 해왔잖아요. 항상 순발력과 신속함 그리고 정확함까지 세 가지를 다 갖춰야 했기에 일의 중압감이 굉장히 컸었어요. 그런데 기업은 매일매일 승부를 건다기보다는 멀리 보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1년 후가 됐든 2년 후가 됐든 성과로 보여주면 되죠. 많은 분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받아들이되 진정성을 가지고 차근차근 좋은 결과를 준비하고자 해요.”
각계각층에서 러브콜을 받았던 그이가 KT를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다. KT 기업 이념이 자신이 추구하는 수익의 가치관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공기업이었던 KT가 민영기업이 된 지는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KT는 민영기업으로서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두면서도 이와 같은 수익이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보탬이 될지 먼저 생각해보는 교육을 전 직원에게 우선적으로 실시한다. 상생과 공존, 동반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것.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니 직원들의 의욕과 사기도 굉장히 높은 편이에요. 저 역시도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고요.”

영원한 지원군, 국제변호사 남편과 다섯 살배기 외아들
이렇듯 똑 부러지고 명쾌한 김은혜도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다. 청와대를 사퇴하고 KT에 입사하기 전 4개월이라는 잠깐의 공백 기간 동안을 제외하고는 지난 20년간 새벽에 출근하고 자정이 다 되어야 퇴근하는 생활을 이어갔으니 무엇보다 가족의 이해와 희생이 필요했을 터.
“오늘도 회사를 가는데 아이가 바지를 붙잡고 늘어지더라고요. 사실 그동안 웬만큼 단련(?)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이들의 엄마에 대한 갈망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 같아요.”
기자 시절이던 2006년 국제변호사인 남편과 결혼하여 2007년에 아들을 출산하고 2008년부터는 청와대 대변인 생활을 시작했으니 가정생활에는 거의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일에 관해서는 프로인 김은혜라도 엄마가 되고 난 후부터는 항상 일과 아이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젖먹이 아이를 떼어내고 나오는 엄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청와대 대변인 시절, 한 번은 아이가 돌을 갓 지났을 무렵 큰 사고를 당했던 적이 있어요. 저는 이미 출근을 했을 때였고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가 소파에서 떨어졌고, 유리창 틀에 얼굴을 부딪쳐서 살이 찢긴 거예요. 그때라도 남편이 바로 봤으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을 것인데,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자신의 부주의로 아이가 다치면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얼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를 안고 옥상에 숨어 계셨던 거예요. 남편이 출근을 할 때까지요. 결국 남편도 저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연락이 닿아 저희 친정 부모님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어요. 연로하신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급하게 전화를 하셨는데 당시 저는 대통령님과 지방 출장을 가서 업무보고를 받고 있었고 그때는 모든 휴대폰이 차단되기 때문에 연락을 받을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죠.”
결국 점심시간에 잠시 휴대폰을 켰을 때 아이의 사고 소식을 알았지만, 국가 중대사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에 “내 아이가 다쳤으니 가봐야겠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데도 그이는 일단 모든 업무를 책임감 있게 마쳐야 했다. 밤 11시쯤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누워 있었고 남편은 아무 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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