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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3월호 -PEOPLE/박진탁
[옛날 Queen 다시보기] 1991년 3월호 -PEOPLE/박진탁
  • 양우영 기자
  • 승인 2021.06.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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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호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펴는 국내 최다 헌혈자 박진탁

"헌혈 위해 아들 딸 이름도 '헌혈'과 '뽑기'로 지었죠"

20여년 간 1백13회의 헌혈을 해 국내 최다 헌혈자로 인정받은 박진탁 목사(55). 그가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인 '장기 기증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신장을 무료로 기증해 화제가 되고 있다. 통상 혈연 관계에서만 실시해 오던 신장수술의 관행을 깨뜨린 박목사의 뜨거운 '이웃사랑'-.

1991년 3월호 -PEOPLE/박진탁
1991년 3월호 -PEOPLE/박진탁

 

'피 같이 아깝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소중한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이 '피'이기 때문일 것이다. 

위급한 환자들을 위해 피를 나눠주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박진탁 목사(55 ·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대표).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잔신의 생명을 걸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1968년부터 현재까지 두달에 한벌꼴로 꼬박꼬박 헌혈을 해온 것이 벌써 1백13회. 그는 '국내최다헌혈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이미 76회째부터 최다 헌혈자로 인정받은 이후로도 2개월을 주기로 줄기차게 피를 뽑아 내곤 했기 때문.

그가 처음 피를 뽑은 것은 지난 66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 우석대 병원 원목으로 있을 때였다. 밤늦게 응급환자가 실려왔는데, 당장 수혈을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당직의사는 박목사를 불러 사정 얘기를 하며 "나하고 같이 사람 하나 살리자"고 권유했다. 얼떨결에 팔뚝을 내밀어 피를 뽑게 된 것이 국내최다 헌혈자가 된 계기.

"그 환자가 며칠 후 건강하게 퇴원하는 것을 보고 저는 무척 감격했습니다. 당시로선 피를 뽑는다는 게 두려운 일이었지만 몸에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이처럼 값진 봉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를 평생 헌혈운동에 몸 바치도록 한 겁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박목사는 진지하게 헌혈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당시 유행병처럼 번졌던 '매혈'실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선진국에서는 부족한 혈액이 대부분 헌혈로 충당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헌혈운동의 바람을 이 땅에 일으켜야겠다'고 결심, '사랑의 헌혈선교회'를 설립해 전국의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그의 헌혈운동에 자극받은 대한적십자사도 74년부터 헌혈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딸 이름은 '뽑기', 아들 이름 '헌혈'

헌혈에 대한 박목사의 집념은 대단했다. 
첫딸이 태어났을 때 그는 아이의 이름을 '뽑기'라고 지었다. 유리창 너머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헌혈운동에 온신경을 집중시키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저애도 16세가 넘으면 한 병(?) 뽑을 수 있겠구나'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감격스러운 나머지 딸 이름을 '뽑기'(21 · 미국 산타바 바라대 재학)'라고 짓고 이듬해 태어난 아들은 '헌혈(20 · 하버드대 응용수학과 2년)'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집안어른들의 반대에 부딪쳐 호적에는 '진희' '정수'라고 올려놓았지만, 지금껏 집안에서는 여전히 원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아내 홍상희씨(50)와 두 자녀 역시 2개월마다 한번씩 헌혈을 하는 동반자가 됐다.)(중략)

 

Queen DB

[Queen 사진_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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