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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에이스와의 작별 하늘나라 마운드로 간 고(故) 최동원
영원한 에이스와의 작별 하늘나라 마운드로 간 고(故) 최동원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0.1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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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잃은 상태에서도
현역 때 던졌던 야구공 손에서 놓지 못해… 인생의 전부를 야구와 함께했던,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영웅”

 


1980년대를 주름잡던 한국야구계의 전설 최동원이 우리 곁을 떠났다. 2007년 대장암 발병 후 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부터 다시 암세포가 퍼지면서 병세가 악화됐고, 결국 지난 9월 14일 오전 2시 즈음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투병 중인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현역시절부터 ‘무쇠팔’을 자랑하며 누구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였기에 꼭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을까. 갑작스런 최동원의 별세 소식에 야구계는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고인의 빈소에는 3일 내내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구본능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비롯해 롯데 장병수 사장, 한화 정승진 사장 등 각 구단의 사장 및 관계자들이 잇달아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던 선동렬 등 각 구단의 현직 감독들과 정동진 전 삼성 감독, 양상문 해설위원 등 야구인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84년 고인과 함께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강병철 감독은 이틀 째 고인의 빈소를 지켰다. 이밖에도 그의 팬을 자처한 전 KBO총재인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과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 등 정치인들을 비롯해 그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그를 좋아했던 많은 야구 팬들이 빈소를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9월 16일 새벽에 거행된 고인의 발인예배는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고인의 가족과 평소 그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 야구관계자 등 총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됐다. 발인예배를 주관했던 김명수 평강교회 목사는 “최동원이라는 최고의 투수를 만나서 우리 모두는 행복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영정 속 고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남은 이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교인들의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고인이 있는 관이 영구차에 실리자 아들을 먼저 보낸 고인의 어머니가 오열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영정사진을 안고 있던 그의 외아들 최기호 씨와 아내 신현주 씨 역시 슬픔을 억누르는 듯했지만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깊은 슬픔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벽제화장장으로 옮겨진 고 최동원은 이날 오후 한 줌의 재로 변해 경기도 일산에 있는 청아공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불멸의 기록 남긴 영웅을 회고하다
살아생전 고인의 별명은 ‘무쇠 팔’이었다. 그의 빠른 직구와 어떤 뛰어난 타자도 예상하기 어렵다는 낙차가 큰 변화구는 그를 마운드의 신으로 만들었다. 홈런을 한 번 맞으면 다음 대결을 할 때 “또 한 번 쳐보라”며 다시 똑같은 직구를 던지는 배짱도 투수로서 그를 더욱 성장하게 했다. 그만큼 당대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투수로 1984년에는 223개 탈삼진으로 한 시즌 최다기록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국시리즈에서는 7전 4선승제에서 혼자 4승을 올리는 진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1986년과 1987년에는 후배이자 영원한 라이벌로 불린 선동열 전 삼성 감독과 연장 15회 맞대결을 펼친 끝에 2대 2라는 영화 같은 승부를 펼쳐 많은 야구팬들에게 감동을 줬다. 이렇듯 최고의 실력을 가진 투수로 1980년대를 주름잡던 그였지만 1988년, 야구인으로서 한 차례 위기에 봉착한다. 선수협회 창립을 주도했다가 그의 친정팀이나 마찬가지였던 롯데를 떠나야했던 것. 한동안 야구계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동안 그는 방송계와 정치계에 잠시 입문하기도 했지만 2001년 결국 그의 고향인 야구계로 돌아가게 된다. 당시 한화 감독을 맡고 있던 김인식 감독의 주도로 한화의 코치를 맡게 된 것이다. 야구를 할 때 온전히 빛을 발하던 그는 이후 후배들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2007년 발병했던 대장암의 병세가 악화돼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도 고인은 한화 2군 감독으로서 역량을 펼쳤다. 지난 7월에는 병색이 짙은 와중에도 경남고와 군산상고 레전드 매치에 참석해 모교인 경남고를 응원했다. 당시 그는 다이어트를 해서 부작용이 일어난 것일 뿐이라고 투병사실을 부인했다. 최고의 투수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도 완치에 대해 의욕을 가지고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는 떠나고 말았다. 지도자 생활을 하며 고향 팀 롯데의 감독을 맡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종종 밝혀오기도 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룰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러한 고인의 꿈을 추모하기 위한 남은 이들의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가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현역시절 친정팀이었던 롯데는 그의 생전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9월 30일 부산에서 열리는 두산전을 ‘최동원의 날’로 지정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고인의 등번호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부분에 대해 긍정적인 검토 중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그의 모교인 연세대에서는 일산에 있는 연세대 삼애캠퍼스에 ‘최동원 야구장’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야구 영웅, 고 최동원.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한국야구계의 최고의 영웅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 최동원의 외아들 최기호 씨가
영정을 가슴에 품고 나오자 고인의 모친과 아내 신현주 씨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올리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을 때의 모습. 그는 빠른 직구와 낙차가 큰 변화구로 모든 타자들을 맥없이 무너뜨린 전설의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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