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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한평생 고통스러웠던 삶의 일기장” 딸 바보 한대수의 뚜껑을 열다
“음악은 한평생 고통스러웠던 삶의 일기장” 딸 바보 한대수의 뚜껑을 열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2.12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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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그의 삶은 꽤나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시기를 말하자면 환갑에 얻은 딸 양호가 태어나기 이전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거리낄게 없고 자유로웠던 보헤미안의 삶은 그때부터 착실하게(?)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에 대해 처음으로 깨달았어. 그래, 화폐 말이야. 돈이 완전히 물이구나. 나 혼자 살 때는 돈이 필요 없었거든. 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나가면 오히려 서로 오라고 난리들이었지(웃음). 그럼 단물(술)도 한잔하고, 길가다 5천원짜리 국밥하나 얻어먹는 건 일도 아니었단 말이야. 그러다 앨범 만들고 공연하고, 가끔 책도 쓰고 하다보면 돈 주더라고. 그럼 돈인가 보다 하고 살았는데…. 애가 생기니까 모든 것이 돈인 거야.”
생전 쳐다보지도 않았던 분유가 그렇게 비싼지 환갑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 돈이면 단물을 밤새도록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양호가 네 살이 되고 어린이집에 가다보니 돈은 끝없이 필요한 것이 됐다. 머리를 한 대 세계 맞는 심정이었지만 아버지니까 어쩔 수 없다.
“내가 굶고 어려움을 겪는 건 큰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애는 기회를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적으로 화폐가 필요한 거고. 그래서 이제는 정기적으로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거야(그는 방송인 손숙과 함께 매일 오전 라디오 〈행복의 나라로〉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굉장히 피곤하지. 보통 때는 세수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되는데 이젠 매일같이 샤워를 해야 하니…. 미치겠네(웃음).”

또 한 명의 세시봉 맴버
다시 말하건대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가 태어나서 얼마 안 돼 서울 공대에 재학하고 있던 부친 한창석 씨는 핵물리학 분야의 최고인 미국 코넬대로 유학을 떠났다. 수소 폭탄을 발명한 에드워드 텔러 박사가 선발한 학생이었던 아버지는 7년이 지난 후 돌연 실종되고 만다. 가족이 백방으로 찾았지만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고 어린 아들의 곁을 떠났다. 결국 10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낸 것은 FBI였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하워드 한’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백인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핵물리학자였던 그는 인쇄회사 사장이 돼 있었다. 가족을 알아보긴 했어도 한국말을 잊은 아버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지만 아버지는 20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잃어버린 10년의 기억을 말하지 않았다. 부모의 부재 상황에서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은 한국에서 했고 졸업은 미국에서 했다. 또 중학교는 미국에서 입학하고 한국에서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또 그 반대였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미국에서 다녔다. 한국인도 아니었고 미국인도 아니었던 유년기의 굴곡은 그의 정체성을 흔들고도 남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1968년은 인생의 전환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왔고 세시봉의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헤어졌거든. 사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가장 필요할 때잖아, 굉장히 가슴 아픈 거지.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때 내가 뉴욕에서 생활했어요. 미국이 뒤집어지던 때였지. 히피문화, 반체제운동…. 지금 월 스트리트 시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시기에 뉴욕 한복판 이스트빌리지에서 살았으니, 사업가인 큰 외삼촌이 와보고는 기가 막혔겠지(웃음). 사진공부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머니한테 외삼촌이 내 이야기를 한 거야. 그래서 어머니가 눈물의 편지를 써서 제발 한국으로 오라고 하시더라고. 그때가 열여덟 살이었으니 어머니랑 헤어진 지 벌써 11년이 지난거야. 어머니는 항상 그리움이거든. 그래서 온 거야 어머니 때문에….”
미국에서 살던 시간 동안 그 역시도 시대를 풍미했던 히피 문화에 속해 있었다. 세시봉 무대에 섰을 때 긴 머리와 히피 특유의 옷차림, 당시 개념도 없었던 싱어송라이터로 홀로 하모니카와 기타를 치며〈물 좀 주소〉를 외치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낯설고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히피라는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히피가 나쁜 말은 아닌데, 자꾸 나쁜 쪽으로만 몰거든. 마약과 섹스…. 물론 둘 다 아닌 건 아니지만(웃음). 그 반면에 창의력도 있고 자유로운 음악과 예술이 있는데 그 부분은 보질 않더라고. 사실 사진 예술이든 음악이든 영화, 문학이든 60~70년대가 르네상스였어요.”
암울하던 유신시대와 상관없이 그의 음악은 자유로움 가득한 로큰롤 그 자체였다. 세시봉을 무대로 활동하며 한편으로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공무원으로도 일했다. 한국인으로서 3년 3개월을 해군으로도 복무했다. 제대한 뒤에는 〈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일하며 1집 〈멀고 먼 길〉을 발표했고 그 이듬해 문제작이 된 2집 〈고무신〉을 연이어 세상에 내놨다. 그간의 경험이 음악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곧 체제전복적인 음악이라는 딱지가 붙여진다.
“만약에 군대에 안 갔으면 음악이 좀 더 착해졌겠지. 3년 동안 얻어맞으면서 인류애가 사라져버렸어. 인간이 이렇게 나쁜 동물이구나 싶었지. 〈고무신〉도 문제였지만 자기들(문화공보부)이 1집도 자꾸 들어보니 이상하거든. 생각지도 못한 음악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도 심상치 않았나봐. 결국 전부 방송 금지, 음반 판매 금지…. 조국에서 인정 못 받고 다른 나라로 떠난다는 게 매우 섭섭했고 마음이 텅 비더라고.”
당시 결혼까지 했던 그였지만 암울했던 상황에서 7년 만에 다시 미국행을 택했다. 이후 한동안 그의 소식은 드문드문 들려왔다.

2011년, 한국에서 느끼는 것들
그가 한국에 다시 정착했을 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 꽤 오래전에 첫 결혼을 이혼으로 마감했고 스물두 살 차이의 러시아 출신 아내 옥사나와 다시 결혼을 했다. 4년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딸을 얻었다. 생에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이름이 따라 붙었다. 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화폐’를 벌어야 했다지만 요즘 그의 일상은 꽤 즐거워 보인다. 오랜만에 뭉친 세시봉 맴버들과 공연을 앞두고 있고, 후배 가수들과 교류도 심심치 않게 이어진다. 그 와중에 딸 양호를 ‘양호하게 키우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여느 아버지 못지않다. 그러나 삶의 이면을 뒤집어 보면 역시 고통이 존재한다. 한때 뉴욕에서 10만 달러 연봉의 잘 나가던 커리어우먼이었던 아내 옥사나는 중증 알코올의존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을 뒷바라지 하는 게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음악은 한평생 고통스러웠던 내 인생의 일기장”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서 내가 인생의 문제점은 침대 매트리스와 같다고 했잖아. 위에 누워 있으면 편안할 것이고 밑에 깔리면 죽을 것같이 괴로울 것이다. 위에 누워 있어야지 뭐,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는 거고…. 물론 음악이 없었다면 내 속은 터졌을 거야(웃음).”
자신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그만큼 익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오래전 이혼을 했을 때도, 뉴욕의 홈리스를 보면서, 알코올의존증에 빠진 아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는 곡을 써내려갔다. 이렇듯 자신의 삶과 스쳐지나가는 인간 군상을 로큰롤로 표현하는 그의 눈에 한국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비춰질까.
“한국 젊은이들이 고뇌하는 것은 전 세계 젊은이들과 똑같아. 수준이 그렇게 돼 버렸어. 서울은 국제도시가 됐으니까. 문제는 고차원으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에 적합한 직장이 없는 거야. 우리 때는 무조건 일하고 밥만 먹으면 바랄게 없었어. 지금은 어찌 보면 지적인 부분에서 똑같은 ‘물 좀 주소’야. 아직도 목말라 있어.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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