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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선비의 정신을 잇다 진주 유씨 대종가 종택 안산 청문당
곧은 선비의 정신을 잇다 진주 유씨 대종가 종택 안산 청문당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12.1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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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큼 생활이 여유롭지는 않지만, 집안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집안의 명성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27세손 유보형 씨가 29세 대종손 유기정 씨에게 집안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였을까. 종택 주변에서 옛 정취를 느끼기 힘들었다. 한때는 진주 유씨의 집성촌이었다는 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일대. 지금은 주택지는 거의 사라지고, 유통회사들의 물류창고가 대신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이질감을 보이는 한 기와집이 서 있었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4호이자 진주 유씨 대종가의 종택인 청문당(淸聞堂)이다. 산업화 된 세월 속에 이곳만은 시간이 빗겨간 듯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의용은 느끼기 힘들지만, 이곳은 조선 중기에는 오준·허목·채유후·강백년·허적 같은 당대 명사들이 매화음을 즐겼던 집이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진주 유씨 집안의 사위인 표암 강세황의 미술과 혜환 이용휴의 시문학, 그리고 순암 안정복의 민족사학이 태동한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다. 조선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문사들의 교류 장소가 됐고, 더 나아가 기호남인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된 실학의 산실이 됐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대표 교류지
“원래의 모습과는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이곳에 오면 마당에서 뛰어놀던 어린시절이 떠올라요. 몇 대에 걸쳐 살아온 곳이라 진주 유씨 가문에서 이곳은 종택 이상의 의미를 가진 곳이죠.”
취재진을 안내한 유보형 씨는 진주 유씨 27세손이다. 비록 대종손은 아니지만 그만큼 진주 유씨 종친 중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마다 옆에 있던 조카 손자이자 종손인 유기정 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청문당은 안산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가옥이다. 진주 유씨 16세손인 유시회(柳時會, 1562~1635)가 처음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유시회는 선조 22년에 전사시에 합격했고, 1600년 용천군수를 역임했다. 이후 호조정랑, 회양부사, 중화부사, 사옹원정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과 인조 때는 평산부사와 선산부사, 홍주목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유시회는 원래 충북 괴산에 살았는데, 유시회의 조카 적이 선조의 아홉 번째 부마로 정해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선조의 명으로 안산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이후 나라에서 넓은 땅과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받아 대대로 살아오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이 집은 ㄱ자의 안채와 ㄱ자의 사랑채가 마주 보고 있으며, 현재에는 후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자형의 바깥채가 중앙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팔작지붕이고, 그 위에 기와를 덮었으며 대청은 여섯 칸으로 중앙부 뒤쪽으로 반 칸을 내어서 벽장을 달고 좌우 양쪽에 세살문을 붙였다. 사랑채의 지붕도 팔작지붕이며 이곳에는 만권서적이 보관된 서고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청문당은 약 16,500m2(약 5천여 평)의 대지 위에 현정(玄亭), 하당(荷堂), 희한당(凞閑堂), 만권당 서실 등 부속건물과 정원이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을 실경(實景)으로 그린 강세황의 <지상편도>가 지금도 종가와 그의 본댁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언제부터 청문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시회의 아들에 이르러 청문당은 만권서를 쌓아둔 곳으로 이름이 났다. 청문당은 조선후기에 와서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교류장으로 쓰였으며, 특히 조선시대 4대 서고의 하나인 청문당의 만권루는 이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조선후기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은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태생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즉 조선후기의 학문과 예술발전에 기반이 된 장소였다.

1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 선생의 지상편도. 지상편도는 청문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로 인해 청문당 복
원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청문당의 안채 3 종택의 안채 뒤로 모과나무가 보인다. 이 나무는 20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집안의 보물인 서적, 전쟁 통에 유실
“당시 이 고장 아이들이 ‘원컨대 유 감사댁 종이 되어 만권 서적을 실컷 포식하고 싶다’라는 동요까지 퍼졌다는 것이 야사에 남아 있어요. 당시 만권서적 소장처로 ‘조선사대 만권당’의 하나라는 평까지 받게 됐죠. 이 만권당은 18세기 중엽에 당쟁으로 벼슬길에서 멀어진 기호 남인들과 소북인들이 즐겨 찾고 모인 자리이기도 했죠.”
유보형 씨는 당시 만권당의 장서 수가 최대 몇 권까지 되었는지 장서목록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만권당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상당히 많은 책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대대로 집안의 보물로 내려왔다. 일제시대 때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가 여러 차례 찾아와 책의 매입을 간청했으나 집안의 어른들은 끝내 책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책을 어렵게 지켜왔는데, 전쟁 때 많은 책을 잃어버리게 됐어요. 전쟁 당시 이곳이 피난민의 피난처였는데, 많은 책들이 취사용 불쏘시개나 어린이들의 딱지 접기에, 또는 화장지로 이용돼 거의 없어지고 겨우 500권 내외 정도 밖에 남지 않았죠. 참 안타까운 일이죠. 남은 책은 모두 안산시에 기탁했어요. 남은 책이라도 제대로 보존하려면 보존을 위한 현대적인 시설이 필요하니까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거죠. 현재 책은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보관돼 있고, 이곳에서 전시될 예정이에요.”

종택의 복원위해 시에 기부채납
종가에서 기탁한 것은 책뿐만이 아니다. 종가에서는 지난 2006년 청문당을 안산시에 기부채납했다. 자손들의 힘만으로 청문당을 유지 관리하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그만큼 기부채납할 때 안타까움도 있었죠. 하지만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변해가게 두기보다는 지키고 싶었어요.” 문중에서는 집을 기탁하는 대신 안산시에 복원공사의 책임을 맡겼다. 청문당은 지난 2006년에 1차 복원공사를 마쳤다. 복원공사는 표암 강세황 선생이 그린 <지상편도>를 기반으로 한다. 표암 선생의 그림에는 옛 청문당의 모습이 자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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