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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조용기 목사 '희망과 긍정의 전도사, 커다란 위안을 남기다'
고(故) 조용기 목사 '희망과 긍정의 전도사, 커다란 위안을 남기다'
  • 류정현 기자
  • 승인 2022.02.21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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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계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용기 목사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9월 14일 교인들의 곁을 떠났다. 그는 교인 5명의 천막교회에서 시작해 80만명의 교인을 품은 세계 최대 교회를 일군 ‘선교의 신화’의 주인공이다.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부흥회를 통해 병으로 고통받는 교인들의 아픔을 덜어준 목회자로 평생을 바쳤던 고인의 큰 발자취를 돌아봤다.
한국 종교계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용기 목사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9월 14일 교인들의 곁을 떠났다. 그는 교인 5명의 천막교회에서 시작해 80만명의 교인을 품은 세계 최대 교회를 일군 ‘선교의 신화’의 주인공이다.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부흥회를 통해 병으로 고통받는 교인들의 아픔을 덜어준 목회자로 평생을 바쳤던 고인의 큰 발자취를 돌아봤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조용기 목사가 지난해 9월 14일 오전 7시13분께 별세했다. 향년 86세. 고인은 2020년 7월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지금까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지만 끝내 병석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교회의 큰 기둥이었던 조용기 목사가 남긴 영향이 워낙 크기에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 베다니홀에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5일 내내 수많은 교인들이 조문했고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문재인 대통령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목사님 말씀은 큰 위안이었다.(중략) 목사님 소천으로 상실감이 클 한국 교회에 진심어린 추모의 마음을 전한다”는 조전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천막에서 시작해 세계최대 교회를 일군 ‘선교 신화’의 주인공
 

조용기 목사는 1958년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설립한 천막교회를 현재는 교인 수 80만여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키워낸 ‘선교의 신화’를 쓴 주인공이다.

조 목사는 1936년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조두천씨의 5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 부산공고를 진학했던 그는 2학년 때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인생의 행로가 바뀌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던 당시 병문안 온 누나의 친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다.

20세에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나중에 장모가 된 최자실 목사와 만났고, 1958년 함께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시작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처음 교인 5명으로 시작한 천막교회는 그의 설교로 하나 둘 신자가 불어나기 시작해 3년도 안 돼 3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후에도 폭발적 성장을 거듭해 서대문 순복음부흥회관(1961년)을 거쳐 1973년 여의도로 이전했다. 모래벌판이던 여의도에 세워진 교회는 1979년 10만명, 1981년 20만명, 1984년 40만명, 1992년 70만명을 잇따라 돌파하며 현재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세계 최대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조 목사는 예수를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부자 되는 물질 축복과 건강 축복까지 받는다는 ‘3박자 구원론’으로 세속적 욕구에 부응하며 엄청난 호응을 얻어냈다. 여기에 혼자서 목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울 지역을 20개 구역으로 분할한 후 평신도 여성들을 구역장으로 임명해 구역 모임을 이끌게 한 것이 신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비결이 됐다.

조용기 목사의 영향력을 받은 제자들은 국내외 할 것 없이 목회에 성공해 큰 교회를 이끌었다. 특히 외국에서 온 목회자들이 순복음교회의 성장비결을 배우고 돌아가 구역조직을 현지 목회에 접목해 엄청난 부흥을 이뤘다.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취약계층을 돕는 다양한 사업과 함께 남북관계 개선에도 크게 기여했다.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을 통해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외국인근로자 등 취약계층을 경제적·의료적으로 돕는 행복나눔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또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심장병원을 건립하자고 제안하자 적극 앞장서기도 했다.
 

“할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희망’과 ‘긍정’의 힘 전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장 2절)

조용기 목사가 평생 가장 사랑했던 성경 구절이다. 그는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평생을 지냈다고 한다. 그의 삶과 목회 사역을 관통하는 말은 ‘희망’과 ‘긍정’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고 긍정한다면 무엇이든 진짜로 이뤄진다는 믿음을 교인들에게 전파했다. 평생 그의 삶을 관철한 그 믿음이 신자 수가 가장 많은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일군 원동력이 됐다.

2008년 5월 초 목사는 3차례 투표를 통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영적 아들’인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양했다. 당시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세습’으로 비난받던 상황에서 가족이 아닌 후계자에게 교회를 물려준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은 후에도 조 목사는 매일 새벽 2~3시면 일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매주 주일 오후 1시 예배 설교도 계속했다.

조 목사는 주로 병자를 치유하는 부흥회를 통해 많은 교인들의 아픔을 덜어준 목회자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젊은 날부터 지속적으로 병고 속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폐결핵을 앓았고, 1961년 군입대를 했다 장질환으로 대수술을 받고 8개월 만에 의병제대했다. 2006년엔 파킨슨병 진단까지 받았다. 그 독한 병마를 믿음과 신앙으로 이겨냈던 그였다.

하지만 세월을 이겨내는 장사는없다고 했다. 2020년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난 부인 고 김성혜 한세대 총장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교회로 돌아오지 못했고, 파란만장했던 86년의 삶을 마감했다.

조 목사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빛과 발자취는 세상에 깊게 각인돼 남아있다. 미국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박사는 “한국의 조용기 목사는 20세기 후반 들어 가장 강력하게 세계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지도자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수많은 교인들은 “코로나19로 교회가 어려운 시대에 영적 큰 별이 지셨다”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후계자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는 “육신으로는 떠나보내지만 저에게, 그리고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성령운동의 불길이 타오르는 모든 곳에서 조 목사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힘으로써 그 분의 신앙을 이어가겠다”라고 다짐했다.


글 류정현 기자 | 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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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한 2022-03-01 22:36:50
잘 사망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