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5-01 08:05 (수)
 실시간뉴스
마음을 타고 흐르는 소월의 詩 소월의 증손녀가 노래하다
마음을 타고 흐르는 소월의 詩 소월의 증손녀가 노래하다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2.17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이 없었다. 마음까지 얼어붙는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미라의 뼈마디 같은 앙상한 가로수 길을 벗어나 약속 장소에 다다를 무렵, 무심코 귀에 흘러온 음악에 발걸음을 붙잡히고 말았다. 기교 없이 너울지는 청음은 시이기도 하고 노래이기도 했다. 화려함을 포기하고 절절한 진솔함만을 담은 과감성에 발이 묶여 음악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잠깐 신록을 피워내고 사라진 이름 없는 노래는 댄스음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순수의 소녀를 기다리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으로 불현듯 찾아온 인연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뤄진 것은 뜻밖에도 공중파 뉴스를 통해서였다. 청음의 주인공은 김소월 시인의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 씨였다. 그제야 음악이 가진 호소력의 연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이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이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는 그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소월의 증손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의 노래
약산에 진달래꽃이 자신의 옅음을 부끄러워해 꽃잎을 떨굴 만큼 김상은 씨는 붉게 만개해 있었다. 김 씨는 김소월 시인의 ‘맏딸의, 맏딸의, 맏딸’이다. 문학으로 일생을 보낸 소월이건만 이해득실에도 꽤나 밝았는지 살림밑천이 되는 첫딸을 내리 4대나 지속했다. 그러던 것을 욕심 없는 김 씨가 첫째로 아들을 낳으면서 맏딸 내력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듯 귀한 대문호의 가계이건만, 장녀의 후손이 주목을 받은 것은 최근 김 씨에 이르러서다.
“증조부께서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어요. 그중에 네 분이 북에 계시고, 작은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한에 계셨어요. 그런데 언론에 비친 것은 대부분 작은 할아버지셨죠. 할머니 시대만 하더라도 딸은 출가외인이라거나 직계자손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인지 증조부님의 자손으로서 할머니는 없는 존재와 같았어요. 그러다 언제부터인가는 완전히 잊혔죠. 심지어는 친척들도 모르더라고요. 우리는 그동안 세상에 없는 존재였어요.”
그러다 김 씨와 김 씨의 외가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김 씨가 2009년 처음으로 김소월 시인의 증손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무대에 서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또한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아주 우연하게 또는 운명처럼 다가온 일이었다.
“우리 집 피아노를 조율해주시는 분이 계세요. 그분이 우리 집 피아노를 조율한 다음에 소월 아트홀 피아노를 조율하러 간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제가 김소월 시인님의 증손녀예요’라고 말해버렸어요. 그래서 그분을 통해 소월 아트홀에 그 소식이 전해졌고 제가 음악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관계자 분이
‘소월 아트홀 5주년 기념회’ 무대에 서달라고 부탁하셨죠.”
하지만 김 씨는 그 부탁을 몇 차례나 거절했다. 갑자기 소월의 자손으로서 나타나 뭔가를 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김 씨는 결국 소월 아트홀 관계자의 끈질긴 설득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 그리고는 관객의 뜨거운 반응에 무척이나 놀란다.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관객 분들이 소월을 너무 사랑했어요. 제 손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시는 어르신도 계셨고 제 노래에 다들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내주셨어요. 저는 그동안 CCM가수로 활동하면서 <위로>라는 앨범을 냈고 실제로도 세상의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겠노라 결심했었죠. 그런데 이미 제 안에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었던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내가 소월의 증손녀로서 저분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고요.”
김 씨가 소월의 자손이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김 씨와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김 씨는 국내 정상급 음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소월의 노래>라는 앨범을 완성하게 된다. <소월의 노래>는 옛 시인의 덕이 만들어낸 앨범인 셈이다. 김 씨는 소월의 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월의 노래> 역시 누구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기교를 배제하고 가사의 느낌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르를 나누기가 어려운 앨범이 되었다. <소월의 노래>는 <소월의 노래> 그 자체였다.

고통과 위안의 변주곡
2009년에 김 씨가 소월의 증손녀로 무대에 선 이후로 많은 공연과 자선단체로부터의 봉사활동 요청이 쇄도했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스케줄에 힘겨웠지만, 김 씨는 사회적인 관심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김 씨에게는 소월이라는 이름이 숙명처럼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그렇게 양로원과 고아원, 암 환자센터 등을 오가며 2010년엔 앨범준비까지 함께했다. 당시 김 씨는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소월의 곁으로 떠났다.
“유산을 하고 너무나 힘들었어요.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은 드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병실에서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는데 저도 모르게 소월의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 그 광경을 봤다면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때 저도 모르게 읊었던 시가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내가 해온 봉사와 노래는 진정한 위로가 아니었구나. 위로는 누군가가 찾아가서 힘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게 아니구나.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게 위로구나. 진정한 위로는 그런 거였어요.”
창밖을 보며 김 씨가 읊조렸던 소월의 시는 <못 잊어>와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그 순간 두 편의 시는 소월이 증손녀인 김 씨를 위해 준비한 위로였다.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증손녀의 고통을 예측이라도 한 듯한 소월의 대여섯 줄의 시구는 상처 입은 증손녀의 마음을 끌어안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가 할아버지의 품에서 울음과 응석을 터트리는 꼬마아이처럼 김 씨는 소월의 따듯한 품 안에서 마음껏 울음을 쏟아냈다. 그렇게 울음을 쏟아내고 나니 창밖으로 소월의 손을 잡고 떠나가는 셋째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환한 표정의 아이에게 김 씨는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족의 길을 비추는 달빛
소월은 열네 살에 세 살 연상의 홍실단과 결혼한다. 꼬마신랑의 조혼제도가 유행했던 시대상을 비춰볼 때 소월은 노총각의 나이로 결혼한 셈이었다. 사색을 좋아하고 낯을 가리던 소월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결혼해야 했다. 그런 소월이었지만, 소월은 아내를 소중히 대했다고 한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나고 자라신 증조부님께서는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셨어요. 증조부님께서는 방학에는 증조모님과 함께 정주에서 생활하시고 방학이 끝나면 증조모님을 친정집에 데려다 주셨대요. 아내 혼자 집에 남아 있으면 시집살이할까 봐요(웃음). 오히려 그거 때문에 증조모님께서 미움을 많이 받으셨대요.”
그런 부부애를 바탕으로 소월과 실단은 6남매를 낳는다. 그중의 맏딸이자 김 씨의 외할머니인 김구생 씨는 전쟁 통에 병사한다. 그때 김 씨의 어머니인 최정자 씨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최정자 씨는 현재 김 씨의 옆집에 살고 있다. 그리고 김 씨는 의사인 남편과의 사이에 아홉 살 아들과 일곱 살 딸을 두고 있다.
“제가 오늘처럼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해야 하면 어머니가 오셔서 아이들을 봐주세요. 오늘도 제가 잡지사 인터뷰를 간다고 하니까 볼멘소리를 하시더라고요. ‘내가 소월의 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