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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탄생과 법전 : 함무라비 법전
문명의 탄생과 법전 : 함무라비 법전
  • 전현정
  • 승인 2022.12.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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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어 살기 위해서는 규범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법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 질문에 정확하게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인류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고 당시 사회 규범이 어떠했는지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편찬한 법전은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을까?

인류 최초의 법전은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원지인 수메르 지역에서 만들어진 ‘우르-남무 법전’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탄생한 수메르 지역을 통일한 왕이 법전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법조항 32개와 함께 전해오는 서언에는 법을 만든 목적이 담겨 있다. “나는 고아가 부자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과부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1세켈 가진 사람이 1미나 가진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양 한 마리 가진 사람이 황소 한 마리 가진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채홍식 역주, 『고대 근동 법전과 구약성경의 법』).

법전의 첫머리에서 고아가 부자에게 넘어가지 않고 과부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내세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부와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법의 기초를 찾고, 법을 단순한 통치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될 무렵부터 이러한 숭고한 뜻을 염원하며 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우르-남무 법전보다 1300년쯤 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은 고대의 법전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이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기원전 1750년경에 편찬하였다. 함무라비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 11명의 왕 중에 여섯 번째 왕이었다. 함무라비 이전의 고대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고 자신의 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통일된 법을 만들었다.

함무라비는 정의를 펼치고 공정한 판결을 하며 약자를 위해 애쓰는 임금으로 인식되고자 하였다. 법전에서 스스로를 태양신으로부터 백성의 통치를 위임받아 평화를 가져오고 의로운 통치를 하는 임금으로 묘사하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원형이 소장되어 있다. 20여 년 전에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높이 2미터가 넘는 기다란 섬록암 기둥에 글자가 가득 새겨진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윗부분에는 태양신 샤마쉬가 함무라비에게 법을 수여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샤마쉬는 정의의 신으로 모든 법의 수호자요, 압제받는 이의 보호자를 상징한다. 법전은 서언과 결언, 그리고 28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원전 1750년에 만들어진 법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다. 법전의 앞뒤에 있는 서언과 결언은 아름다운 시 한편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탈리오의 법칙, 즉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한다는 보복 법칙의 잔재가 남아 있지만, 이집트와 달리 상업과 무역이 활발했던 사회상을 반영하여 금전의 대여, 밭과 주택의 임대에 대해서도 규정을 두고 있다. 절도나 상해와 같은 형사 문제뿐만 아니라, 혼인과 상속, 간음에 관해서도 많이 다루고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어느 시대나 재산과 가족관계가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의 맨 앞장에서 ‘공정한 재판’에 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어떤 시민이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웠을 경우, 살인죄를 뒤집어씌운 자는 사형에 처한다(제1조). 한 시민이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고 그가 한 말을 증명하지 못하였는데 그 소송이 사람의 목숨과 연관되어 있을 경우, 그 시민은 사형에 처한다(제3조). 곡식이나 돈에 대한 거짓 증언을 했을 경우, 그는 재판의 판결에 해당하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제4조).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고 봉인된 문서로 저장하였는데 나중에 그의 판결을 변경했다면 그 소송에서 선고한 액수의 열두 배로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재판관은 다시는 재판할 수 없다(제5조).

누군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자를 엄하게 처벌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이 법전의 맨 앞에 나온다. 고소나 증언을 사실과 다르게 할 경우 형사처벌을 하고, 고소당한 사람이 중죄로 잘못 처벌받는 경우에는 허위 고소나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의 책임을 무겁게 추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법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법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법의 남용을 억제하지 않으면 법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법은 왕권이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권력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강력한 왕이나 권력자의 시대에 유명한 법전이 탄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는 로마법대전과 프랑스 민법전은 각각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나폴레옹 시대에 만들어졌다. 함무라비왕은 고대 바빌로니아를 번영으로 이끌며 강력한 권력을 토대로 법전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법전을 통해 먼 인류의 후손에게까지 이름을 길이길이 남기고 있다.

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개인의 기본적 권리나 인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법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법 때문에 억울한 꼴을 당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권리가 중요하듯 타인의 권리도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법을 다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법률가에 대한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 거의 30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법을 악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려준다.

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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