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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저편
인권의 저편
  • 전현정
  • 승인 2022.12.2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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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가 그런 사람이다. 미국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내였던 그녀는 세계인권선언을 들고 있는 사진으로도 많은 영감을 준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1946년 유엔총회의 미국 대표로서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프랑스 법률가인 르네 카생과 함께 1948년 12월 10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의 탄생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세계인권선언의 채택을 기념하기 위해 1950년 제5차 유엔총회에서 12월 10일을 세계인권선언 기념일로 지정하였으니, 지난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는 국제적인 날이었던 셈이다.

세계인권선언은 20세기 현대사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이었다. 6,5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만행이 저질러졌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야만의 전쟁과 결별을 선언하고 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의 소망을 담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말할 자유, 신앙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등장”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한 기본적 권리를 인정해야만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를 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권 문제는 모습을 바꿔가며 새롭게 등장했다. 역사적으로 노예해방, 인종차별, 종교적 박해, 남녀차별, 아동의 인권 문제에서부터 장애인, 난민, 이주노동자 문제나 노인 문제까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권 문제가 나타난다.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할 수 있지만, 대체로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인권을 침해하는 사건을 단죄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하였다.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법원은 구체적 사례에서 인권을 증진하는 판단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에 대해 의문이 드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어느 사회든 어느 시대든 범죄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범인 또는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을 무조건 엄벌하려고 한다면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든 피의자든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법에 정해진 처벌을 해야 한다. 나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니 엄벌에 처할 운명이라고 한다면, 중세의 마녀재판이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치를 무시한 엄벌주의만큼 인권에 적대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마녀사냥이 사라진 것은 미신을 타파한 과학 때문이 아니라 근대 사법체계의 확립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제도가 완비된 오늘날에도 마녀재판 같은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곤 한다.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과 정치인의 포퓰리즘이 함께하면 상황은 더 어렵게 된다. 악의 꽃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 인권은 한 발짝 물러서서 사태를 보는 데 있다. 남의 아픔을 내 일처럼 느끼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뛰어들더라도 한 발짝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인권 감수성이 무뎌질 위험이 있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면 안 된다.”이 말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준수해야 할 명제이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이 중요하다고 선언한 데 그치지 않고 법의 지배를 통해 인권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여기에 세계인권선언의 생명력이 있다.

인권의 친구는 누구이고 인권의 적은 어디에 있는가? 인권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인권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인권의 적이다. 사사로운 욕심이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리거나 외면하게 만든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모든 사람은 사회적 신분, 그 밖의 지위에 따른 어떤 구분도 없이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는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라고 하였다. 인권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행동 기준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남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권 문제이다. 자기 자신이 인권 침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인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타인에게는 가혹한 이중잣대는 인권과는 거리가 너무 먼 행동이다. 흑백논리와 마찬가지로 이중잣대도 경계해야 한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키워나가는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데서 인권의 친구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샛노란 은행잎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이를 기초했던 사람들, 인권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싶다.

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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