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4:45 (토)
 실시간뉴스
새해 아침에 되새겨보는 이태영 변호사의 삶
새해 아침에 되새겨보는 이태영 변호사의 삶
  • 전현정
  • 승인 2023.01.22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과 법

“법에서 꽃이 필 수 있을까. 법에도 눈물이 있다지만, 법처럼 굳은 땅에 어떻게 싹이 틀까. 바위 밑에서 민들레가 돋아나듯, 아마도 꽃 피우는 법이 따로 있기는 있을지 몰라.”

정희성 시인이 2008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회관 신축 기념식에서 읊은 ⟨겨자꽃 핀 봄날에⟩란 시의 한 구절이다. 오랜 만에 다시 보았는데도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살아난다.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해 코로나라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 인류 전체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 일상의 자유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새해 아침에 어두운 시대에 횃불처럼 빛났던 여성법률가,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이태영 변호사는 여성의 지위 향상에 헌신했던 걸출한 인물이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중 결혼을 하였다. 세 아이를 낳은 다음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94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서울대 법대 최초의 여학생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최초의 여성 법학박사였으며 1968년에는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으로 취임하여 최초의 여성 법대학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러 개 보유했던 이태영 변호사는‘법과 인습에 억눌려 우는 한국 여성과 평생 같이 눈물을 흘리는 삶’을 선택하였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여성의 삶은 매우 암울하였다. 1952년 여성 최초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지만 야당 인사인 정일형 박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19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창립하며 여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1981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창립 25주년 기념식사에서 ‘일찍이 어린 시절에 변호사가 되겠다는 희망은 가졌지만 이런 상담소를 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던 제가 어느덧 일생의 반 토막을 상담소에 바치고 이제 내일 모레면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이 나라 5천년 역사에 최초로 여성의 몸으로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기쁨을 채 가누기도 전에 판사 임명을 거부당했을 때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깊은 충격과 실의에 빠졌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 갈 길은 따로 있다는 하늘의 뜻이었나 보다.’라고 말한다.

이태영 변호사가 법률가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여성들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을 겪었다. 봉건적인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어 이혼을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시대였다. 이태영 변호사가 자신의 집에 처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을 때 남편의 외도와 폭력에 시달렸던 불쌍한 여성들이 찾아와 안방 건넌방 마루방에 우는 여자만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태영 변호사는 ‘길을 열어서 그 길을 걸었다.’ 여성의 아픔과 암담한 현실에 눈을 뜨고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찾아서 가정법률 무료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 누구의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가족법 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고난의 시기를 새로운 전기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역사는 위인으로 기억한다. 이태영 변호사는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아침마다 직원들과 함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불행한 자, 약자를 위해 겸손하고 자비롭고 지혜롭게 도와줄 일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을 알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은 위인들의 공통점이다.

이태영 변호사는 용기와 결의를 지닌 당당한 여성이었다. 사회의 불의를 보면 정열적으로 앞장서 나서는 실천력을 보였다.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이 오히려 차별적인 법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직시하고 가족법 개정 운동에 나섰다. 가족법의 부부 차별적 요소와 남녀 차별적 요소를 개정하고 폐지하기 위해 반세기 가까이 벌인 가족법 개정운동은 1977년과 1989년 두 차례의 중요한 가족법 개정이라는 결실을 맺고 이태영 변호사의 사후에 호주제 폐지로까지 이어졌다.

오랜 세월 가정법률상담을 해온 이태영 박사에게 어느 인터뷰에서 결혼에 대한 조언을 달라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은 성장배경과 교육이 다른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므로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에요. 나한테 꼭 맞는 상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야말로 큰 오산입니다. 나는 결혼생활에서 ‘남편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말을 늘 해왔는데 그러나 먼저 준 것은 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옥살이하는 남편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날부터 나는 가난한 살림 속에 팔을 걷어붙이고 소처럼 부지런하게, 힘차게 일했어요. ‘소’라는 내 별명은 그때부터 얻은 것이에요.”

‘먼저 준다’는 삶의 지혜는 비단 부부관계에만 합당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여러 인간관계를 비롯하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나 국가 안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퇴보의 순간을 견뎌내고 조금씩 진보해 왔다.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좀 더 살만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 그녀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한국 여성계의 거성이자 자랑거리인 이태영 변호사를 떠올려 보며, 올해 많은 분들이 삶의 여정에서 꿈을 찾고 그 꿈을 가꾸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