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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집
노년의 집
  • 전현정
  • 승인 2022.10.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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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젊은 시절을 보낸 바다에서 최후의 사투를 벌인다. 평생을 살아온 바다에서 온 힘을 쏟아 부을 수 있었기에 행복했을까? 뼈만 남은 앙상한 청새치를 끌고 오는 모습은 마치 오딧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폭풍우를 헤치고 귀환하는 듯한 장엄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2021년 한 해 동안 31만 7,800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약 74.8%가 요양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에서 사망을 했고 주택에서 사망한 비율은 16.5%이다(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잠정] 결과). 독일이나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의 경우에 약 50% 정도가 의료기관에서 사망하고 40∼50% 정도가 주택 등에서 사망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집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매우 낮다. 사람들의 인식(희망) 여론 조사에 따르면, 80% 이상이 집에서 사망하기를 원한다고 하니, 노년을 마무리할 장소에 관한 희망과 실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셈이다.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우에노 지즈코 지음)라는 책은 노년의 삶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일본의 동경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저자는 여성 사회학자로서 본인 스스로 혼자서 노후의 삶을 살면서 노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은지에 관해 의미 있는 제언을 하고 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어 일찍이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고령 사회에 대한 대비나 실험도 앞서 나가는 편이라서 ‘노인의료 천국’이라는 얘기도 듣는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죽어가는 노인을 병원이나 시설로 보내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최근 들어 이런 상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에노 지즈코는 ‘혼자 늙는 사람은 불쌍한 걸까, 자녀가 없는 노후는 정말로 비참한 걸까, 병원이나 시설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치매 환자는 시설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까,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이런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노후에 혼자 사는 삶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통계를 제시한다.

이 책에서 노년의 삶에 관해 제안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족스러운 노후를 살려면 익숙한 장소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어떤 고급 시설도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시설은 한번 들어가면 삶을 마감할 때까지 나오기 어렵다. 노인만 따로 모여 살 필요도 없다. 치매 환자처럼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경우라도 고령자 시설보다는 집에서 사는 것이 낫다. 자신의 집에 살면서‘방문 간병, 방문 간호, 방문 의료’라는 3종 세트를 추가하면 된다.

노인의 상태가 위급해 보이면 반드시 119를 불러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119에 실려 오는 고령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섣부른 연명 치료가 뒤따를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사를 두려워하지만,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꼭 옆에 있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간병 서비스가 있는 한 고독사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노인 환자를 가족이 돌보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가족의 돌봄 스트레스와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노인들 스스로 집을 떠나 병원이나 시설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집이 누구에게나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는 장소가 아닐 수 있다. 주거 환경이 열악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노인에게는 자신의 집에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이나 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되겠다. 이 책은 노년에 살아갈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한 사람의 삶이 주체적이고 존엄한 삶으로 마무리되려면 노년을 존엄하게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에서 대어를 낚았을 때 줄을 타고 전해오는 전율을 느끼며 인생의 찬란한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노년에 존엄한 삶을 누리는 것은 개인적 준비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 사회 전체의 의료·복지 시스템과 문화적 성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글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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