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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름으로 - 이자스민의 솔직한 생각 정치권 영입설 이주 여성의 성공한 아이콘으로 부상
엄마의 이름으로 - 이자스민의 솔직한 생각 정치권 영입설 이주 여성의 성공한 아이콘으로 부상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2.03.2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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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스민과 인터뷰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최근 언론을 통해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에서 그녀를 비례대표 영입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서울시청 글로벌 센터는 이를 확인하는 문의전화가 폭주했다고 한다. 심지어 120다산 콜센터를 통해서도 연락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영화 〈완득이〉 출연 이후 유명세에 안 그래도 불편함이 적지 않았는데, 꽤 곤란했던 눈치다. 사실 정치권과 관련해 그녀의 영입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0년 한나라당 서울시의회 비례대표 영입 대상으로 거론된 적도 있었다. 덕분에 그녀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는 것은 이미 학습(?) 된 셈이다.
“어쨌든 저는 공무원이잖아요. 전화 돌려주는 일이 다반사라 동료들한테 너무 미안해요. 그 전에도 알아보는 분들은 종종 있었는데, <완득이>가 상영된 이후에는 화장 안하고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겠어요. 어딜 가나 ‘완득이 엄마’로 불리니, 바쁜 상황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거나 사인을 해달라는 분도 계시는데, 난감하죠.”
한국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18년을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탓에 유창하게 쏟아지는 한국말 솜씨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오히려 유창하다는 말조차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딸내미’라든지, ‘시댁식구’와 같은 단어에서 영락없는 아줌마의 포스가 감지된다. 외모야 어찌됐든 그녀는 현재 고등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키우며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보통의 한국 워킹맘이다. <완득이> 출연 이후 아들, 딸의 반응을 이야기하며 입가에 띄는 웃음은 여느 ‘엄마’와 다름이 없다.
“아들은 저한테 ‘엄마 덕 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한 것 같은데, 여학생들이 와서 함께 사진찍자고 한다며 좋아하더라고요(웃음). 딸내미는 아직 초등학생이라 친구들이 잘 모르지만, 간혹 어쩌다 영화를 본 아이가 <완득이> 이야기를 하면 은근히 나서서 ‘거기 나오는 필리핀 사람이 우리 엄마야’라며 자랑한다고 하고요(웃음). 요즘 아이들은 연예계를 동경하니까 아무래도 더 그런가 봐요.”

정치,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된다면…
그녀는 현재 외국인 공무원 1호로 서울시 글로벌 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주 여성들이 중심이 된 ‘물방울 나눔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한 기회에 영화 <의형제>와 <완득이>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도 만만치 않다. 어느 순간부터 성공한 이주 여성의 아이콘이 된 그녀.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던 새누리당이 영입을 고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제 수만 명의 이민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다문화 사회가 아닌가. 그녀가 욕심껏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단 저는 엄마잖아요. 이제까지 제가 한 일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것들이에요. 언젠가 TV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왕따가 될 수 있다거나, 성인이 됐을 때 (사회문제가 되는)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걸 봤어요.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시한폭탄이다, 시한폭탄이다 하면 커서 뭐가 되겠어요. 정말 시한폭탄밖에 안 돼요. 그리고 미디어를 보면 이주여성은 모두 어렵고 한국에 와서 도망가고, 돈 벌러 온 사람들로 비쳐지더군요. 애들도 보고 ‘엄마도 돈 벌러 왔냐’, ‘위장결혼은 뭐냐’고 물어요. 그것은 아이들에게 너무 안 좋은 영향이거든요. 저 역시 사회 활동을 하기 전에 한 10년 동안을 집에만 있었어요. 저만 숨어서 있으면 아이들은 문제없겠다 싶었죠. 그러다 아들의 학교에 배식당번으로 가게 되면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주저하며 학교에 온 그녀를 보고 아들의 친구들이 신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서워서, 아들이 혹 왕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당황했다는 그녀. 그러나 아들은 그녀의 걱정과 달리 자랑스럽게 “야, 우리 엄마야, 엄마! 영어하는 것 좀 보여줘”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면 미소 짓는 그녀였지만 내심 정치 입문과 관련해서는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생각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구체적인 제안이 온 적은 없다”면서도 나름의 소신을 털어놨다.
“아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한국으로 이주한 많은 다문화 가정 엄마들이 똑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죠. ‘내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개인적인 생각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하게 된 것이고요. 정치를 할 거냐? 제 대답은 이 사회가 0.001%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이 된다면 ‘하겠다’예요.”

사랑이 뭐기에
그녀는 필리핀에서 부족함 없는 가정 출신이다. 더구나 의대 입학을 앞두고 있던 재원이었다. 게다가 눈에 띄는 미모까지 갖췄으니,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영락없는 ‘엄친딸’이었다.
“필리핀에서도 한국과 같이 자녀에 대한 기대가 커요. 특히 저는 맏딸이라 부모님은 제가 잘돼야 동생들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셨죠.”
그런 그녀가 집안을 발칵 뒤집으며 돌연 한국행을 선언했던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운영하고 있던 가게에 음료수를 사러 들어왔던 남편이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것. 큐피드의 화살을 제대로(?) 맞아버린 남편에게 12살의 나이차이나 국적은 상관이 없었다. 외항선원으로 2박 3일의 체류 기간 동안 그녀가 있는 가게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구애를 하던 남편은 한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다 선원 계약이 끝나고 부터는 2주 간격으로 필리핀을 방문해 끈질긴 구애를 펼쳤다. 급기야는 커다란 가방을 가지고 와서는 ‘결혼할 때까지 여기 있겠다’며 불법 체류자가 되도 상관없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남자에게 안 넘어 갈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다. 바로 그녀 부모님의 반대였다.
“엄마는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남편의 마음을 받아줬어요. 그 뒤로 엄마는 ‘이런 남자가 없을 것’이라며 많이 편을 들어줬어요. 하지만 아빠는 끝내 반대하셨어요. 결혼식에는 오셨지만 끝내 결혼을 동의하는 라이선스에는 서명을 하지 않으셨죠.”
결혼 후 그녀와 남편은 사실 필리핀에서 신혼생활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필리핀과 달리 입맛 좋게 밥을 먹는 남편을 보고 ‘이 사람은 여기에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결국 그녀는 그렇게 한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 생활이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일단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고, 시할머니까지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했다. 그녀는 ‘쉽지 않았지만 필리핀 사람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겨냈다’며 웃음 짓는다.
“한국 사람들은 맏며느리가 힘들다고 생각하더군요. 그건 아마 ‘모신다’와 ‘함께 산다’의 차이인거 같아요. 필리핀에서 저는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 외에 모신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같이 산다는 것에 부담이 없었어요. ‘Live Together’였죠. 그런데 시할머니까지 같이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슨 고생이냐’ 그래요(웃음). 시댁 식구들과 제 생각을 공유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더군요.”

불행을 극복하고
한국에서의 삶은 한동안 평탄했다. 아들과 딸이 태어났고 남편의 사랑은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2010년 즈음이었다. 가족 모두가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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