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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과 동거 사이
혼인과 동거 사이
  • 전현정
  • 승인 2023.01.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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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구성하여 사는 모습이 천차만별이듯이, 가족을 이루어 사는 방법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전동거가 늘어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결혼식을 연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면서 혼전동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도 줄어들었다.

유럽에서는 혼인을 하는 부부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비혼인 공동체가 증가하자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혼절차가 복잡하고 이혼할 경우 부담하는 부양의무 등을 사람들이 꺼려하여 혼인율이 감소하고 동거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혼인에 비해 부담이 적은 ‘느슨한 결합’을 모색한 결과 1999년 연대의무협약(PACS)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체결하는 계약이다. 서로에 대해 동거, 부양, 협조 및 정조의무가 있지만 인척관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 2020년에는 급기야 혼인을 하는 사람보다 많아졌다.

벨기에는 당사자 사이에 아무런 신분관계도 창설하지 않고 단지 재산관계만 단순하게 규율하는 법정동거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것은 혼인과는 아주 다른 제도로 반드시 성적 결합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양, 협조, 정조의무도 부담하지 않는다. 파트너의 가족은 친척이 아니라 친구의 가족일 뿐이고 재산은 별산제로 운영된다.

프랑스의 연대의무협약이나 벨기에의 법정동거 제도는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결합을 법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결혼처럼 강력한 결합보다는 느슨한 결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아주 소수라면 여전히 제도 밖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수가 많아져 제도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비혼인 공동체를 혼인처럼 강력하게 보호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사람들이 이용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인지 아닌지에 따라 법률관계가 완전히 달라진다. 헌법 제36조에서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정하여 혼인과 가족제도를 보호하고 있다. 민법에서는 혼인과 가족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다. 혼인신고를 하면 가족관계등록부에 가족으로 기재되고 가족에 관한 법규정이 적용된다. 법적으로 가족과 비가족의 경계가 분명하다. 이혼을 하면 혼인 전과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돌아간다.

물론 혼인신고만 하지 않은 채 혼인의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에는 사실혼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사실혼을 동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둘은 법적으로 엄연히 다르다. 사실혼은 당사자 사이에 혼인 의사가 있고 객관적으로 사회관념상 부부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있는 경우여야 한다. 이를테면 결혼식을 하고 살면서 혼인신고만 하지 않는 경우에는 사실혼관계가 인정되어 법적으로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단순히 동거를 한다고 해서 사실혼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여러 형태의 동거가 사실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만나 생활을 같이하는 삶을 규율하는 제도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와 같은 방식으로 정하기보다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것이 바람직하다. 제도가 사람 사는 다양한 모습을 포용할 수 있어야만 사람들이 그 제도에 대해 속박이 아니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함께 사는 것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결혼처럼 완벽한 결합을 이상으로 삼는 안정적인 제도가 맞는 사람도 있지만, 좀 더 느슨하고 자유로운 관계가 더 잘 맞는 사람도 있다. 생활공동체에 관한 관념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슨한 결합이 어울리는 사람들까지 예외 없이 혼인이라는 엄격한 틀에 집어넣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제도를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또 다시 새로운 제도를 만든다. 제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오래된 제도라고 하더라도 그 제도가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구속하고 좀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제도가 있다면 제도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혼인할 수 있는 상황이 예전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결혼 이후의 삶이 결혼 전보다 나아질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결혼이라는 강력한 결합이 잘 맞지 않는 사람에게 현재의 혼인제도는 속박이 될 수 있다. 혼인의 틀 안에 들어갔다가 그것이 맞지 않아 이혼을 할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보다는 혼인 이외의 생활공동체를 마련하여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서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인보다 가볍고 느슨한 결합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느슨한 결합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글 전현정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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