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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데이비스의 도전
지나 데이비스의 도전
  • 이복실
  • 승인 2022.12.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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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데이비스는 1980년대 활동했던 미국 할리우드의 톱스타이다. 롱 키스 굿나잇, 델마와 루이스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여 명성을 얻었다. 배우 시절에는 수많은 할리우드의 미모 여배우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중에 영화계의 성차별을 개선하는 일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나는 2018년에 세상에 나온 다큐멘터리 『할리우드의 여성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제게는 보이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어요. 설명할 자료가 필요했죠.” 2009년 지나는 영화계의 성차별 지수를 개발하기 위하여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이끄는 여성운동은 단순히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하여 현실의 문제점을 입증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 데이비스 재단'은 구글과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공동 협력하여 지나 데이비스 포용지수(GD-IQ)라는 지수를 만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남녀 배우의 출연 빈도, 대사 분량, 대사의 내용과 질을 수집하여 통계를 내어 발표한다. 2016년 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비애니메이션 분야 영화 및 드라마 200개를 분석한 결과 남자 배우들의 출연 분량은 28%에 달해 16%에 그친 여자 배우들 분량의 2배에 육박했다. 대사 분량 역시 남자 배우들이 28.4%로 15.4%를 기록한 여자 배우들을 압도했다.

이런 경향은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2018년에는 『할리우드의 여성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원제는 This Changes Everything. 이것으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와 여감독들이 출연하여 그동안 겪었던 일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무려 3번이나 받은 메릴 스트립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배우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느끼는 한계와 애로가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성 역할 고정관념이나 성차별은 개인의 명성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세계 공통어였다.

할리우드의 톱스타인 샤론 스톤은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디렉팅을 해줄 테니 무릎에 앉으라는 감독도 있었어요. 거부하면 트레일러로 보내 버렸어요. 톰 행크스도 감독 무릎에 앉나요? 여성들은 예술가로 인식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리즈 위더스푼도 여성들에게 안전망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여성 감독과 일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배급사와 평론가, 의상 팀과 미술팀도 다 남성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남성의 시각에서 영화가 제작될 수밖에 없어요.” 여성의 역할은 제한되고 여성의 이미지는 소극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리즈 위더스푼은 제작사를 만들어서 본인 스스로 영화제작에 뛰어들었으며, 메릴 스트립은 여성 영화감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생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긴 그녀들의 용기와 실천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2017년 서울 YWCA가 각 방송사의 22개 드라마를 모니터링한 결과 드라마 제작자의 68%는 남성, 작가의 69%는 여성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드라마 속에서 남성은 주로 의사 검사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전문직, 여성은 판매사원 아르바이트 등 비전문직으로 묘사됐다. 갈등유발자 중 여성의 비율은 61.8%, 갈등해결자 중 남성의 비율은 64.2%였다. 무기력하고 대책 없는 여성들을 구조하는 남성 주인공의 이야기나 가난한 미모의 여성이 부유한 왕자님을 만나 결혼하는 신데렐라 탄생 스토리는 아직도 인기 소재이다. 현재 상영 중인 드라마 『월수금화목토』도 그렇다. 여주인공의 직업은 비혼을 원하는 고객을 위한 결혼 마스터라는 기이한 직업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객이 다 100% 남성이라는 점이다. 날씬하고 바비 인형 같은 외모의 예쁜 여주인공은 결혼 때문에 성가신 남성 고객들을 위하여 계약 아내 노릇을 한다. 찬거리를 사서 식사를 준비하고 저녁 식사를 같이한다. 날씬하고 미모의 여성이니 아내 계약의뢰가 들어 올 것이다. 남성을 위한 여성의 삶을 강조하는 내용은 단순히 재미로 보기에는 너무 불편하다. 이렇게 외모를 중시하고 성 역할을 강조하는 드라마를 보고 청소년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최근의 줄거리는 잘 모르지만 이어지는 내용도 별반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소재의 드라마를 보고 지나 데이비스는 무어라고 말할까 궁금해진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 출연한 프랑스 출신 배우 줄리엣 비노쉬는 몇 년 전 영화제에 참석해 “여성이 특정 방식으로만 보이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도록 배역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작품 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아내’로 불렸고 그 이후로 그런 섭외를 거절했다”라며 “마초 코드 밖에서 일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지나 데이비스나 줄리엣 비노쉬같은 같은 행동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영화계의 차별 해소 운동이 성과를 내어 우리나라에까지 퍼지기를 바란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청소년기에 주는 영향은 지대하므로 우리 사회에 성 역할 고정관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중매체부터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의 지나 데이비스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글 이복실(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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