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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삶”
손미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삶”
  • 신규섭 기자
  • 승인 2023.04.05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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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일간, 800km의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
대자연과 늘 함께였던 산티아고 순례길.
대자연과 늘 함께였던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은 아나운서였다. KBS 아나운서로 ‘도전 골든벨’, ‘가족오락관’, 9시 뉴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딱 10년을 아나운서로 산 이후 그녀는 작가, 허핑턴포스터코리아 편집장, ‘인생학교’ 교장, 손미나앤컴퍼니 대표 등을 지냈다. 
‘경험부자’를 자처하는 그녀가 이번에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지난해 5월 23일부터 7월 5일까지, 43일간 800km를 걸었다. 준비 기간만 4개월.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습관처럼 그날들을 정리하며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다큐멘터리가 ‘엘 카미노’. ‘엘 카미노’ 무대 인사로 바쁜 그녀를 가로수길에서 만났다. 
막상 그녀를 만나자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할지 망설여졌다. 작가? 오랫동안 글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라는 호칭만으로 그녀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다양한 직업을 가져서인지 ‘N잡러’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다큐멘터리를 개봉한 후에는 발 빠르게 감독이라고 소개하는 이들도 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빠르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럼 이번엔 감독님이라고 부르기로 하죠(웃음). 스페인과 인연이 깊다 보니 언젠가 순례길을 가리라 짐작은 했습니다. 
“순례자의 길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길이잖아요.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파울로 코엘료의 책도 읽고. 그런데 이런 길을 가는 건 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와요. ‘산티아고 길을 언제 가는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때가 되면 산티아고길이 나를 부른다’라고.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코로나19가 끝나지 않은 시점이라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습니다. 
“코로나19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어요. 3년 넘게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된 거죠. 특히 인간과 인간이 연결이 안 되는 현실에 대해서요. 직장에 속하지 않는 저같은 프리랜서는 대중을 상대로 말하고 여행 다니는 게 직업인데 특히나 코로나19 상황에선 힘겨웠어요. 그리고 자연이 너무 그리웠어요.”

자연이요?
“네. 자연이요. 푸에르토리코 산속에 사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곳에 사는 친구들은 코로나19에도 잘 살더라고요. 도시에 갇혀 사는 우리는 그동안 그 소중함을 몰랐던 거죠. 일상을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외부와 소통 창구가 닫히니까 힘들기도 했겠습니다. 
“그럼요. 재능을 나눌 기회도 차단되잖아요. 그럼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고요. 행복도 거기서 멈추는 거죠. 내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한 거죠. 그게 산티아고 길이었어요.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 자연이 함께 하는 길이기도 하고요. 다행히 스페인어를 하니까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그걸 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산티아고 순례길, 세상으로 난 길

4개월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작한 길. 그러나 처음부터 녹록하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프렌치 로드는 국경을 넘어 첫 성당이 있는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험난한 여정. 그 옛날 프랑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제후국 코르도바를 정복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나폴레옹 또한 이 길을 따라 스페인을 침략했다.    
15km 오르막길을 쉼 없이 걸어 피레네산맥에 오르자, 깎아지는듯한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길이 얼마나 험한지 중도에 포기하기도 하고, 산장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힘든 길인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가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 일행은 예정대로 다음 기착지에 닿았다. 첫날은 그렇게 24km를 걸었다.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던 피레네산맥은 힘은 들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지구가 아닌 곳에 와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돌아보면 순례길 어느 한 곳도 기억에 남지 않는 곳이 없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있을까요?
“하루 평균 25km를 걷다 보면 4~5개 마을을 지나게 돼요. 그래야 다음 알베르게(숙소)에 도착하거든요. 그때 들렀던 모든 곳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리오하의 포도밭과 메세타의 뜨거움과 강렬함은 잊을 수가 없어요.” 

리오하는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죠. 
“수도꼭지만 틀어도 와인이 나온다는 곳이니까요. 리오하 포도밭은 정말 아름다워요. 평평한 고온지역인 메세타는 전체 순례길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데, 금색의 밭이 끝없이 펼쳐져서 신비로울 정도였어요. 순례길은 그런 아름다운 자연과 늘 함께 해요.”

육체적으론 힘들지만, 정신적으론 풍요롭다는 말인가요?
“순례길은 처음에는 육체적 한계와 싸우고, 그 다음은 정신과의 싸움이라고 해요. 순례길을 걸으면 그 말이 실감이 돼요. 순례길을 300km 정도 걸었을 땐 밥 먹고 길에 나서는 것도 힘이 들었어요. 그 즈음에 도착한 곳이 부르고스였는데,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부르고스성당 앞에 서면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더라고요.”   

그 고비를 넘기면 체력도 좋아지겠어요. 
“체력도 좋아지고, 몸도 단단해져요. 초반엔 열심히 걸어도 시속 2km 수준인데, 나중엔 시속 5km로 걷게 되거든요(웃음). 처음 열흘 정도가 고비인 거 같아요. 2/3가 지나면 몸도 단련되고요. 아침에 어플을 보고 20km 미만이면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생각할 정도죠. 최소 28km  이상은 걸어야 걷는 거 같아요. 다녀와서 인바디를 해보니까 온몸이 근육질로 변해있었어요. 지금도 10km 정도는 걸어서 다녀요. 여의도에서 압구정동까지는 걸어서 다니니까요.”

힘들지만 힐링의 시간이었겠네요.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고요. 
“매일 좋은 공기 마시면서 걸으니까 건강해질 수밖에 없죠. 그 길을 맨발로 걷는 분들도 있었어요. 욕심 내지 않고 걸으면 어떤 병도 나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신 ‘언제부터 어디까지 며칠만에 끊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경쟁 하지 않는 걸 배우러 가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순례자의 길.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순례자의 길.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삶

산티아고를 다녀와선 습관처럼 글을 썼다. 책 제목이 ‘괜찮아, 그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코알라컴퍼니)’다. 그녀는 산티아고 길을 ‘마법의 길’이라고 부른다. 짐을 지고 매일 20km 이상의 길을 걷는 건 혹사에 가깝다. 몸은 그렇게 힘들지만 눈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더구나, 그 길에서 나보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가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힐링이 되었다.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은 4가지 행복 호르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동기 부여와 보상과 관련된 도파민, 유대감과 신뢰를 주는 옥시토신, 우울감과 불안감을 제어하는 세르토닌, 통증을 완화시키는 행복 호르몬 엔돌핀이 그것이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4가지 호르몬이 아낌없이 분출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길은 혼자 걷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길에선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길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요. 열린 마음으로 온 사람들이라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안게 돼요. 마음이 열려있으니까요. 죽은 아들을 그리며 독일에서 오신 분이 계셨어요. 십자가에 아들 사진을 붙이는데,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 마음이 와닿더라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첫째 아들이 죽고 그 아들을 대신해 입양한 아들마저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의 수만큼 사연도 다양하겠네요.  
“그런 셈이죠. 한번은 원인도 모른 채 시력을 잃은 분을 만났어요. 힘겨운 시간을 보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자’는 마음으로 집이 있는 프랑스에서 1500km를 걸어서 오셨대요. 죽은 아버지가 남긴 텐트를 지고 이탈리아 북부에서 산티아고로 온 친구도 있었어요. 퇴사, 이혼, 번아웃 등 저마다의 사연은 다양했어요. 인생을 축복하러 왔다는 분들도 있었고요. 특정 직업을 갖게 되면 커뮤니티가 생기고 그러다 보면 거기 매몰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산티아고 길에는 다양한 나라, 별별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다 와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인생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훌륭한 기회였어요.”

성장의 기회였겠군요. 
“제가 돈 대신 사람 욕심, 경험에 대한 욕심이 많거든요. 특히 제 성장에 대한 욕심이 커요. 산티아고 길에선 매일 만나는 자연과,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로 인해 매일 매일 성장할 수 있었요. 일행이 있더라도 힘들어서 얘기도 못해요(웃음). 하루 종일 걸으면서 수행하고 명상하는 거죠.”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가고 싶 정도로요. 저도 소속된 걸 좋아하고, 팀워크도 좋아해요. 제 회사를 할 때도 좋았지만 자유가 보장되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까지 수많은 시간, 자신을 서치하고 나를 찾는 과정을 거쳤으면 좀 자유로워져야죠.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이 내가 원하기보다 부모가,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잖아요. 그게 좀 안타까워요. 저는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특히 단단해진 걸 느껴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거든요. 제가 항상 저랑 같이 있기 때문이죠.” 

다큐멘터리 '엘 카미노'와 신간 '괜찮아, 그 길 끝에서 행복이 기다릴 거야'를 통해 순례자의 길을 경험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엘 카미노'와 신간 '괜찮아, 그 길 끝에 행복이 기다릴 거야'를 통해 순례길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영화와 책으로 만나는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를 다녀온 뒤 그녀는 그곳에서의 경험과 인연을 책과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작가 손미나는 익숙하지만, 감독 손미나는 아직 어색한 이름이다. 물론 다큐멘터리 제작 경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2006년 바로셀로나대학에서 석사 논문을 쓸 때, 콜롬비아·스페인 기자와 함께 2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방송사 출신이다 보니 영상 매체에도 익숙하다. 방송 관련 지인들도 적지 않고.  
산티아고를 염두에 뒀을 때도 글과 영상을 함께 생각했다. 산티아고 여정은 당연히 기록에 담을 텐데, 전문가가 함께 가서 영상을 촬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전제 조건이 있었다. ‘산티아고 길을 가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 그 길이 부르는 사람’이어야 했다. 
마침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 일본 사진작가가 그녀의 뜻에 동참했다. 지인 소개로 만난 20대 영상 작가 또한 흔쾌히 동행에 나섰다. 그렇게 여자 셋이 걸으며 함께 사진을 찍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했다. 다큐멘터리와 책에는 세 사람의 내면의 변화가 그대로 담겼다. 그녀가 책과 다큐멘터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또다른 이유다. 
처음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만 공개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본 지인이 ‘너무 좋다’며 극장 관계자를 소개했다. 그렇게 일이 커져서 CGV 10개관에 걸게 됐고, 반응이 좋아  29개관으로 확대하게 됐다. 
“시사회 때는 전문가분들도 많이 오시고 해서 떨렸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모두들 좋아해주셨어요. 윤종신 오빠도 보고 ‘손미나의 진심이 녹아 있어 감동적이었다’고 칭찬해주셨고요. 일반 관객분들도 우시는 분들이 많아요. 요즘은 농담으로 ‘남들이 우는 게 이렇게 좋은 적이 없었다’고 할 정도예요.”
얼마 후 출간되는 책을 통해서도 진심이 오롯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번 책은 그녀가 만든 출판사 ‘코알라컴퍼니’에서 직접 출간해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책 속에 12개 QR코드을 넣었는데,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드론으로 촬영한 산티아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다.   
“창작을 한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지금까지 10년은 말쟁이, 10년은 글쟁이로 살았잖아요. 그걸 종합해서 좀더 창조적인 일을 10년쯤 더 해보고 싶어요. 다른 나라를 걷든, 차를 타고 여행을 하든 어떤 가능성도 열어둘 거예요. 거기서 얻은 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신규섭 기자 사진 제공 손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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