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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모, 그리고 출산비용
비혼모, 그리고 출산비용
  • 전현정
  • 승인 2023.04.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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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그 사회의 영혼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비혼 커플이 늘어가고 있지만, 비혼 여성이 출산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임신한 비혼 여성이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낙태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낳은 어느 비혼 여성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똑같은 결정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후회를 하는 인터뷰기사를 본 적이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비혼부모 인구는 총 26,652명으로 전체 인구의 0.05%정도이다. 2015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인데, 비혼모가 약 2만 명으로 비혼부의 숫자 약 6,300명보다 3.2배가량 많다.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비혼부모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문화와 시선으로 말미암아 비혼모의 출산이 더욱 힘들다.

비혼모의 임신·출산비용이 문제되고 있다. 비혼 여성이 임신하여 출산을 하는 경우 임신·출산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할까? 비혼모 혼자서 부담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자녀의 아버지가 임신·출산비용을 분담하지 않는다면, 비혼모가 자녀의 아버지를 상대로 그 비용을 청구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문제이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서구의 몇몇 나라에서는 법률에 명시적인 규정을 두고 있다.

스위스의 법률이 간명하다. 스위스 민법 제295조는 비혼모가 임신·출산 등에 관한 비용을 자녀의 아버지에게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비용에는 출산비용, 자녀의 초기비품을 포함하여 임신이나 출산으로 인해 필요하게 된 비용, 그리고 자녀 출산 전 최소 4주 및 출생 후 최소 8주간의 부양비용이 포함된다. 원래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양육비 지급의무는 법률상 친자관계가 존재할 때 발생하지만, 비혼모의 임신·출산비용 등의 청구권과 관련해서는 생부의 인지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증명만 있으면 된다. 스위스 법은 출산 전후에 비혼모가 경제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녀의 아버지에게 출산비용 등 일체를 내도록 한 것이다.

독일도 비슷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부양제공 기간과 법률 요건이 스위스와는 좀 다르다. 부양제공 기간이 출산 전 6주 및 출산 후 8주로서 스위스에 비하여 약간 더 길다. 임신이나 출산으로 야기된 질병으로 비혼모가 소득활동을 할 수 없거나, 자녀의 양육 때문에 비혼모가 소득활동을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는 부양기간이 더 연장된다. 그러나 친족간 부양의무에 관한 규정이 준용되기 때문에 비혼모에게 경제적 여력이 없는 등 부양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고, 생부에게는 비혼모를 일정 기간 부양할 능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요건을 비교해보면, 비혼모의 비용지급청구권은 독일보다는 스위스가 비혼모에게 편리하게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모의 양육비 지급의무는 이미 출생을 한 미성년 자녀에 대해서만 인정된다. 혼인외 출생자에 대하여는 생부의 인지 등을 통해 법률상 친자관계가 발생해야만 양육비 지급의무가 생긴다는 문제도 있다. 민법상 부양의무나 양육비에 관한 규정만으로는 비혼모의 임신·출산비용이나 임신·출산 기간 동안의 부양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법률적으로는 결국 임신·출산비용 등을 비혼모가 혼자서 감당하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비혼모가 자녀의 아버지에게 임신·출산비용과 부양료를 청구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개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행동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 이를 자기책임의 원칙이라고 한다. 아이를 낳도록 한 생부도 비혼모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모든 어린이, 청소년은 그 부모가 결혼한 상태에서 태어났건 아니건 간에 똑같은 보호를 받는다.”라고 정하고 있다. 모든 어린이가 부모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똑같이 보호를 받으려면, 비혼모가 자녀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법적 기초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비혼모에게 출산비용 등의 청구권을 인정하는 것은 자녀의 복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족법의 이념에도 부합한다.

임산부는 현실적으로 경제활동에 어려움이 있다. 비혼모라면 더욱 그러하다. 입법을 통하여 임신·출산비용만이라도 비혼모가 생부에게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출산 전후 일정한 기간 동안 부양료를 인정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비혼모의 임신·출산비용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되었다.

글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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