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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법] 연명의료와 환자의 결정권
[여성과 법] 연명의료와 환자의 결정권
  • 전현정
  • 승인 2023.05.0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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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탄생과 죽음은 미미한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그 탄생과 죽음은 모든 것이다.

며칠 전 종로의 골목길을 걷다가 사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안내하는 입간판을 보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건강상태가 회복할 수 없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연명치료 거부나 중단에 관한 의사를 미리 작성해두는 문서이다. 19세 이상이면 누구라도 작성할 수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이 160만 명 정도이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 등 대도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등록을 하였다. 연령별로는 70대가 가장 많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30자나 되는 긴 이름을 가지고 2016년 2월 탄생하였다. 그로부터 1년 6개월 후인 2017년 8월에 호스피스 제도가, 다시 6개월 뒤인 2018년 2월에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호스피스 완화의료제도와 연명의료제도에 대해 정하고 있다. 그중 연명의료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은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기로 하는 결정을 말한다. 법률에서 사용하고 있는‘임종과정’이란 표현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이 법률이 제정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2009년에 화제가 되었던 김 할머니 사건이다. 김 할머니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폐암 여부를 확진받기 위하여 조직검사를 받던 중 예기치 못하게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심정지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서 연명치료장치를 제거할 수 있는지 문제되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인간 존재와 죽음,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다.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 역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는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에 해당하는 연명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게 된다. 이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하여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상규에 부합되고 헌법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신이나 가족의 연명의료결정 또는 연명의료중단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딪칠 수 있다.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지는 반면, 연명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의미가 없는 연명치료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생명만을 무한정 연장시키는 연명치료를 받게 할 수만은 없다.

연명의료에 관한 결정을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떤 절차에 따라 판단할 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담당의사가 작성한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환자가 사전에 작성·등록해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을 통해 연명치료에 대한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을 찾아가 충분한 설명을 듣고 작성해야 한다. 이런 서면이 없고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면 가족 2명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을 의사가 확인하여 환자의 의사로 본다. 환자의 의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환자 가족이 합의하여 환자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있다. 환자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원칙이고, 환자가 결정하지 않은 경우에 비로소 가족의 결정으로 연명치료를 거부하거나 중단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가족에 의한 연명의료중단결정 이행비율이 사후연명의료의향서에 따른 이행보다 6배가량 많다. 환자가 자신에 대한 연명의료결정을 스스로 하는 것보다는 가족이 연명의료중단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몽테뉴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죽음이 주는 무서움에 대한 가장 한심한 대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죽음을 외면하려고 한다.

‘존엄한 죽음’, ‘좋은 죽음’ 또는 ‘웰다잉’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존엄한’ 또는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가족·친구와 함께 고통 없이 죽어가는 것이 웰다잉이라고 한다. 인간의 존엄은 죽는 순간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명의료에 관하여 환자 스스로 미리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환자의 의사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에도 최대한 그 의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 전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 파트너 변호사)
 

 

전현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199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3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2016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는 법무법인 KCL 파트너 변호사다. 한국여성
변호사회 부회장,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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