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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의 자녀교육] 아버지의 위로 : 꼴찌는 면했구먼!
[명가의 자녀교육] 아버지의 위로 : 꼴찌는 면했구먼!
  • 목남희
  • 승인 2023.12.03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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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수학여행 사진

 

세계적인 교육자인 미셀 보르바 하버드대 교수는 한 매체 인터뷰에서 “부모의 신념과 태도가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라며 “아이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태도를 키워주라”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학창 시절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가지고 집에 온 날, 아버지가 어린 내게 건넨 위로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초등학생 때 필자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집을 떠나 경상남도 산청군 안에서만 무려 11번이나 전학했다. 12번째 전학은 진주로 갔는데, 당시 핑크빛 꿈인 진주여중을 가기 위해 치른 첫 시험에서 65명 중 50등을 했다. 아침저녁 등하굣길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던 초등생활에 익숙했던 내게 매달 나오는 성적표를 받는 건 새로운 환경이었다. 이를 집에 가져와 부모님께 보여드렸더니 아버지는 “꼴찌는 면했구먼! 다음 달에 더 잘하면 되지”라고 위로하셨다. 덕분에 필자는 50등이 꼴찌에 가깝다는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저 성적표에 석차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진주여중 입학이라는 명확한 목표로 등수는 쑥쑥 올랐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늘 비슷한 표정으로 “제법 했네!”라고 칭찬하셨다. 그렇게 필자는 로망이었던 진주여중 교복을 입었다.

공부는 몸부림, 대학은 돌파구

아버지는 조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진주에 집을 지어 10여 년 몸담았던 공직을 그만두고 운수업을 시작했다. 몸이 완전히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그 뒷바라지에 손발을 아끼지 않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방 여섯 칸의 나름 큰 기와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당시 그 집은 아버지가 살던 북천 농민들 눈에 며칠 묵어도 되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내 방은 북천에서 온 손님방으로 내주었다.

고등학생이 되고선 시험공부를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는 동생들을 돌보라고 다그쳤다. “여자가 공부 잘해서 뭘 하려고? 살림을 잘 살아야지?” 그럴 때마다 필자는 성차별에 대한 분노와 서러움 속에서 ‘언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공부는 그 집을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돌파구는 대학! “그래 서울로 대학을 가자!”

아버지의 위로가 없었다면...

본채 아래에 있는 할머니 빈소 방 별채를 공부방 삼아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만 매진한 나날들.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아 유단보(湯湯婆)를 발과 가슴에 묻어야 했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물론 어머니가 연탄불을 넣으려고 하셨지만, 필자는 잠이 올까 봐 한사코 거절했다. 이에 성적은 중상위권에서 금방 상위 10%, 5% 권으로 빠르게 올랐다. 잠이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며 매일 밤을 새우듯 공부에만 집중하는 딸을 보고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셨다. 다행히 3년 아래 동생들도 부쩍 커 서로 싸우지 않고 잘 놀았다.

본채는 여전히 손님으로 북적대고 있었으나 새벽에 학교 가는 내게 따뜻한 밥상 외에는 그 어떤 방해도 없었다. 드디어 일상생활을 온전히 내 손에 쥐게 된 순간이었다. 부모님도 딸이 하고자 하는 일에 완전히 협조적이었다. 그해 서울에 있는 이화여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만약 아버지가 딸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봤을 때 ‘넌 이것밖에 못 하니?’라고 혼냈다면 필자는 아마 집으로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었을 것이다. 시험지를 되돌려 받을 때마다 느낀 좌절감과 허탈함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주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내심 그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꼴찌 면한 것 만해도 대단해!’, ‘하루아침에 도시 학생 따라갈 수 있겠니?’, ‘좀 있으면 잘할 거야’라며 위로해 주셨다. 항상 ‘필요한 거 없니? 참고서도 꼭 사!’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시고 책값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이 같은 아버지의 긍정적인 신념과 태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목남희는 없었을 것이다.

유단보(湯湯婆)-물주머니는 열을 제공하기 위하여 뜨거운 물을 채워 마개로 봉하는 용기이다. 주로 침대 안에 넣어 사용하지만, 특정 신체 부위에 열을 가하기 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출처: 위키백과)

글·사진 목남희(전 단국대 교수)

 

목남희는…

<평범한 가정의 특별한 자녀교육>의 저자로 지난 10년간 단국대학교 상경대 경영학부 교수로 몸담았다. 의사, 판사, 교수, 변호사, 서울대, 하버드대 외 콜롬비아 대학 졸업생 5명을 배출하고 일곱 자녀 중 5명이 박사인 부모님의 교육 비결로 부유한 환경, 부모님의 좋은 학벌, 재능이 아닌 부모님이 몸소 보여준 ‘효의 실천’을 꼽는다. 성적보다 인간성, 출세보다 행복을 강조한 그녀 부모의 이야기는 현대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 널리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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