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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칼럼] 양성평등에 앞장선 남성들
[여성 칼럼] 양성평등에 앞장선 남성들
  • 이복실
  • 승인 2023.07.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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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세계여성이사협회 창립 4주년 포럼에 참석한 남성 오피니언 리더들이 기조 강연을 듣고 다들 한마디씩 하였다. “정말 대단하다. 맞는 방향인데 실천까지 하고, 실천으로 회사가 좋아지다니.” 감탄의 대상은 바로 기조 강연자인 우오타니 마사히코 시세이도 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시세이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5년 만에 판매액을 9%, 영업이익을 41% 끌어올렸다. 시세이도는 150년의 역사와 기술을 축적했지만, ‘잠자는 미녀'로 불렸다. 변화나 발전이 없었다. “시세이도를 깨우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양식을 바꿔야 했다”라며 “중점을 둔 부분이 바로 인재 양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양성평등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

“코카콜라 회장으로 일하다가 시세이도 그룹 회장으로 스카우트 되었어요. 근데 시세이도에 가보니 고객의 80% 이상이 여자인데 사내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던 것이 너무 이상했어요.” “각 부서장에게 승진시켜야 하는 직원 이름 셋을 적어내라고 하면 셋 다 남자를 적어냈어요. ‘여성은 없나요?’라고 물으면 그제야 여성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취임한 뒤 시세이도 그룹 내 여성 이사와 감사의 비율은 0%에서 4%로, 여성 간부 비율도 38%로 늘렸다. 역차별에 대한 남성 직원들의 반발은 없었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여성을 우대해주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단지 남성과 똑같은 선에서 평가하자는 것이어서 반발은 없었다.”라고 답변했다. 다양성의 확보는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기업 여성 이사 의무화 법안 만든 남성의원

우리나라 상장기업 여성 임원 비율은 수십 년간 3%에 머물고 있었다. 이 숫자는 OECD 최하위권이다. 그런데 작년에 시행된 여성 이사 의무화제도 덕분에 콘크리트처럼 꿈쩍도 안 하던 이 숫자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2022년 5.6%, 2023년 8.8%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 이사 의무화제도 덕분이다. 2022년 8월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는 이사회에 여성 이사를 최소 1명 이상 선임해야 한다. 이 제도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원이 주도하였다. 바로 최운열 전 국회의원이다. 그는 법 개정안을 발의하였고, 국회를 통과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최 전 의원은 “특정 성별에 치우치지 말자는 것이 핵심이며 이사회는 성 다양성을 토대로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 전 의원은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로, 19대 국회에서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었다. 2018년 초,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단은 최 의원에게 여성 이사 의무화제도의 도입을 위한 면담 요청을 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여성계의 목소리에 공감하며 “제가 이 법을 추진할게요.”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최 의원님이 아니면 이 법은 통과 안 되었을 거예요.”라고 회고했다. 반대하는 의원을 설득하는 것은 기본이고, 국회 심사과정에서도 빨리 논의될 수 있도록 여야합의를 끌어내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 ‘여성만을 위한 법’이라는 역차별 논쟁에 대해선 “법안 문구를 보라”고 답했다. 법에는 ‘여성 이사’가 아닌 ‘특정 성(性)의 이사로 구성해선 안 된다.’”라고 되어있다. 최 전 의원은 “지금은 이사회 구성에서 여성 이사의 비율이 현저히 낮으므로 여성을 위한 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수십 년 후에 여성 이사가 많아진 시대가 온다면 그때는 ‘남성’을 위한 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법은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양성평등 실천 뒤에는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

“나는 반대한다.” (I dissent.)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을 지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차별에 반대하며 의견을 낼 때마다 한 말이다. 그녀는 비록 소수의견이라도 본인이 옳다고 믿는 신념과 가치관을 명확하게 밝혔다. ‘나는 반대한다.’라고 말한 용기와 논리는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이 그녀가 사후에도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방 대법관으로 임명된 뒤에도 남녀 임금 차별, 남학생만 입학했던 군사학교의 학칙 변경, 여군의 주택수당 미지급 문제 등을 다룬 재판에서 줄기차게 여성의 인권을 대변해왔다. 미 수정헌법 제14조가 보장한 ‘법률에 따른 평등한 보호’의 보장 범위를 그전에는 인종차별에 적용했는데 이 개념을 여성까지 확대하였다.

긴즈버그는 21세에 남편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했다. 한 해 뒤 첫 딸도 출산했다. 남편 마틴은 1950년대에 결혼한 사람 중 드물게 가사와 양육에 적극적이었다. 결혼 당시 그 역시 학생이었지만 아내의 로스쿨 진학을 독려했다. 1950년대에 만났을 때부터 이미 성 역할 고정관념이 없었던 마틴과 같은 파트너가 없었다면, 자신이 대법관으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루스 긴즈버그는 회고했다. 또, “내게도 뇌가 있다는 것을 존중해 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남편 마틴은 생전 인터뷰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아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도 했다. 긴즈버그 부부는 공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서도 양성평등을 실천하였다.

양성평등을 실천하고 앞장선 남성 리더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한결같이 ‘양성평등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 인재의 우수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필자가 최운열 전 의원에게 어떻게 여성 이사의무화제도를 도입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즉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우수한 여성들이 많아요. 남성들보다 절대 능력이 뒤떨어지지 않아요. 아내를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참 현명하고 지혜로워요.”라고 말했다. 양성평등을 앞서서 실천하는 남성들 뒤에는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현자(賢者)가 있었다.

2017년 여성가족부의 주도하에 남성들이 성평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성평등 보이스’가 출범한 적이 있다. ‘보이스’는 남성들(boys), 목소리(voice)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고 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보고, 오죽하면 정부가 나서서 이런 모임을 주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남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과 그런 남성들이 드물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굳이 관주도로 ‘성평등 보이스’를 조직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양성평등에 앞장선 남성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양성평등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에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 이복실(전 여가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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