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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남아공에서 만난 여성
[여성칼럼] 남아공에서 만난 여성
  • 이복실
  • 승인 2023.08.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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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여행 중이다. 남아공을 간다고 하면 주변의 반응은 비슷하다. ‘그 위험한 나라를 왜 가려고 하느냐. 치안 조심해라. 밤늦게 다니지 마라’로 이어지는 안전에 대한 염려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6월에 발표한 미국 경비 보안 업체 ADT 통계에 따르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안전 점수 10점 만점에 1점도 채 되지 않는 0.81점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휴양지 1위로 나타났다. 왜 가냐고 하면서도, ‘좋겠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나의 드림 여행지.’였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정말 케이프타운 오는 길은 멀었다. 한국에서 오는 직항이 없어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20여 시간 만에 도착한 케이프타운은 춥고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었다. 얼른 택시를 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공항 벽에 큰 글씨로 붙어있는 ‘젠더 폭력을 멈추라’라는 캠페인 벽화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여행하였지만, 공항 담벼락에 ‘젠더 폭력방지’ 벽보를 붙인 공항은 처음 보았다. 그만큼 범죄가 자주 일어난다고 볼 수도 있고, 젠더 감수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젠더 폭력은 성별로 인해 일어나는 폭력이나 차별을 말한다.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이 젠더 폭력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 벽보를 보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남아공 출신의 할리우드 스타인 샤를리즈 테론이다. 그녀는 미모의 연기파 배우이기도 하지만,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일에 힘을 쏟고 있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2020년에는 샤를리즈 테론과 그녀가 운영 중인 재단은 코로나19에 따른 구호를 위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재단 측은 “코로나 19의 전 세계적인 확산으로 사람들이 실내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가정폭력을 경험하는 여성들의 삶은 훨씬 더 위험해졌다”라고 재단의 지원 방향에 관해 설명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남아공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정폭력을 다루고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녀가 가정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에 관심을 두는 데는 개인 가족사도 한몫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엄마에게 가정폭력을 행사했는데 그러다가 드디어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가 불과 15살이었을 때, 엄마가 아버지를 총을 쏘아 죽이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엄마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미국으로 가서 세계적인 배우로 크게 성공한다. 2007년에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샤를리즈 테론 아프리카 아웃리치’ 프로젝트(CTAOP)’를 설립하였다. CTAOP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4분마다 한 명이 성폭행을 당한다. Every 14 minutes a woman is raped in South Africa(남아공 범죄 총계, 07/01-09/03.2021). 지난 5월 현지 경찰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성범죄 피해자 수는 1만 명을 훌쩍 넘겼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공항에 젠더 폭력을 멈추라는 벽보가 붙을 만하다. 폭력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 어디엔들 못 붙이랴. 남아공에서 만난 여성 문제는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 문제는 세계 공통의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남아공이 우리보다 앞선 점도 있다. 놀랍게도 남아공의 여성 정치참여율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은 18.64%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아공은 국회에서 여성 의원은 2021년 기준으로 46%로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장관의 40% 이상도 여성이다. 우리나라보다 다양성 측면에서는 앞서 있었다. 포용성과 다양성은 조직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준수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성별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을 때, 사회는 공정하고 평등한 살만한 곳이 된다.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시내 관광버스 가이드도 “우리나라의 장점은 멜팅 팟(melting pot)이에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남아공은 다양한 문화가 용광로처럼 녹아있다. 2021년 기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구는 약 6,020만 명이다. 이 중 약 80%는 흑인, 9%는 백인, 9%는 혼혈, 2.5%는 아시안 및 기타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식 언어만 11가지가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포용하지 않으면 때로는 장점이 아니라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남아공의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때 남아공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정책을 추구했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바로 그것이다. 소수자인 백인이 법률로써 흑인과 토착민에 대하여 직업의 제한, 백인과의 결혼 금지, 승차 분리, 공공시설 사용 제한 등 차별 대우를 하였다. 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후 인종차별적인 요소는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아 보인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희망봉을 다녀왔다. 8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희망봉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가졌던 희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여성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봉에서 기원해본다.

글 이복실(전 여가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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