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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조명-재벌가 여인들④ 대신파이낸셜그룹 이어룡 회장 편
재계 조명-재벌가 여인들④ 대신파이낸셜그룹 이어룡 회장 편
  • 홍성추
  • 승인 2023.10.16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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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창업 회사 물려받은 이어룡 회장의 숨겨진 경영비법”
이어룡 대신금융그룹 회장

 

남편이 사망하자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종합금융그룹을 이끌고 있는 대신파이낸셜그룹 이어룡 회장. 시아버지가 창업한 회사를 물려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어룡 회장의 엄마손 경영과 그룹의 성장과정을 알아본다.

‘큰 대(大) 믿을 신(信)’- 19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광고 카피 사에 한 획을 그었던 한 증권사 광고 문구다. 당시 증권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이 광고 카피를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 증권업의 선두 주자를 자처하며 온갖 혁신을 이끌었던 대신증권은 대신파이낸셜그룹으로 성장한 종합 금융사로 발돋움 했다. 이 종합금융사를 사실상 이끄는 사람이 바로 창업 회장의 며느리인 이어룡 회장이다. 2세 회장인 남편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경영 전면에 나서 오늘의 대 금융그룹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살림만 하던 재벌가 안방마님이 금융재벌 총수로 우뚝 서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이어룡 회장의 ‘엄마 손 경영’의 비법과 그 성장 과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재봉 창업회장 증보증권 인수, ‘대신증권’으로 본격 증권사 경영

대신파이낸셜그룹의 모태는 대신증권이다. 대신증권은 그 유명한 양재봉 창업 회장이 1975년 증보증권을 인수하면서 역사가 이뤄진다. 양재봉 창업 회장은 전남 나주 출신의 금융인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목포상고를 나와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들어가 금융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양 회장은 금융업 일을 하면서 ‘거상(巨商)’에 대한 의지를 늘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미곡상 양조업 등을 하며 사업가의 꿈을 이어갔다. 처음 시작한 일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사업에 쓴잔을 마신 그는 다시 조흥은행에 입행해 은행원 생활을 하다 극장 사업에 손을 대고 대성공을 거두게 됐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양 회장은 대상그룹 임대홍 회장과 해태그룹 박병규 회장과 함께 단자사 설립에 나섰다. 호남 3인방 사업자가 나서 설립한 단자회사가 ‘대한투자금융’이다. 양 회장은 1년 뒤 일본 노무라증권 연구소를 방문하고 증권업에 눈을 돌려 당시 직원 11명에 불과한 ‘증보증권’을 전격 인수했다.

그때가 1975년. 양 회장은 증보증권을 인수해 ‘대신증권’으로 사명을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증권사 경영에 나서게 된다. 양 회장은 명동 국립 국장을 입찰로 인수해 업계 최초로 ‘전광 시황 속보판’을 세우는 등 혁신을 거듭한 끝에 업계 2위로까지 올라서는 등 승승장구했다. 호사다마라 할까 사장 취임 뒤 얼마 안 돼 회사 영업부장이 고객과 회사의 돈을 빼돌리는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결국 양 회장은 사장 자리에 물러나고 시골에서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가 다시 증권계로 돌아온 것은 신군부가 들어선 1981년. 대신증권 대주주들이 양 회장을 찾아와 쓰러져 가는 대신증권을 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당시 대신증권은 자본잠식 상태라 이름만 있을 뿐 껍데기에 불과했었다. 양 회장은 임직원들의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는 한편 대한투자금융 주식을 모두 털고 대신증권 주식을 사들여 명실상부한 대주주로 복귀해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경제가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캄캄했으나 몇 년 뒤부터 유가가 안정되고 국내 정치도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주식시장에도 훈풍이 불어왔다.

대신경제연구소 세우고 종합금융그룹으로

 

주식시장이 살아나자, 양 회장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대신경제연구소를 세우고 경영 혁신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보험 투자자문 회사 등 금융사들을 잇달아 인수하거나 설립하면서 종합금융그룹으로서 면모를 갖춰갔다. 그러나 양 회장은 무리한 확장 정책은 펼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국내 모든 기업이 확장일로를 걸을 때 오히려 상품 주식을 대거 처분하고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무차입 경영에 들어가는 모험을 강행한다. 다른 기업들은 빚을 내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1995년 10월 당시 여의도 본사에서 필자는 양재봉 창업 회장을 만나 직접 인터뷰한 적이 있다. 무차입 경영을 하게 된 경위와 향후 대신증권의 행보에 대해 양 회장은 항상 위기는 잘 나갈 때 조짐이 보인다고 피력했다. 대부분 잘나갈 때는 위기를 느끼지 못하지만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때 자신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기였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했다. 민정당 후원회장을 역임한 것도 호남 출신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김대중 당시 야당 정치 거목과의 관계 때문이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어쨌든 대신증권은 몇 년 뒤 몰아닥친 IMF 위기 때 재벌 계열사가 아닌 증권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회사가 된다. 양 회장의 혜안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증권회사 ‘사관학교’로 불렸던 동서증권이나 고려증권이 이때 부도가 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에도 펀드 열풍이 불 때 다른 증권사들이 고금리 회사채를 편입한 채권형 수익증권을 무차별적으로 판매할 때 그는 이 증권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해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 대우그룹의 부도와 하이닉스 사태가 터지면서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을 판매한 증권사들이 대규모 타격을 입었지만, 대신증권만은 비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험회사 인수로 직격탄, 2001년 차남 양회문 회장이 경영 전면에

양 회장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험회사를 인수했다가 직격탄을 맞고 본인이 갖고 있던 대신증권 주식 대부분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대신증권의 실제 경영인으로 차남인 양회문 회장이 나서게 된 것이다. 이때가 2001년이다. 양회문 회장은 대신증권 공채 1기로 일찍부터 아버지 밑에서 증권 경영 수업을 받아 왔다. 양 창업 회장에게는 4남 4녀의 자식이 있지만 장남은 증권과 무관한 제조업 경영을, 나머지 형제들은 정보통신과 IT 업을 맡아 대신증권은 일찍이 차남이 후계자로 나서게 됐다. 양회문 회장은 취임 후 외형 성장보다 내실을 다지기 위해 재무구조 정비에 나섬과 동시에 생명, 정보 통신 등을 계열 분리하고 대신증권을 증권, 투신운용, 경제연구소 중심으로 재편한다. 한창 그룹 재편을 하던 중에 양회 문 회장은 폐암 진단이 내려진다. 3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 2004년 운명하고 말았지만, 투병 중일 때도 초인적으로 대신증권의 홀로서기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이어룡 회장의 악수 경영과 뚝심

 

이어룡 대신파이낸셜그룹 회장이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룹미션을 선포하고 있다.

 

이후 등장한 이가 바로 양회문 회장의 부인인 이어룡 회장이다. 상명여대 사범대 출신인 이어룡 회장은 남편이 투병 생활을 하는 3년 동안 경영수업을 남몰래 받았다고 주변에선 얘기한다. 남편의 유고 시 직접 경영에 나설 채비를 한 것이다. 이런 용기를 내게 된 이유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사망하자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것도 한 원인이 됐다는 후문이다. 이어룡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대신증권의 전국 영업점 110곳을 모두 돌며 직원들과 직접 만나 악수하는 이른바 ‘악수 경영’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국 영업점의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고 지점장실과 본사 임원실 창을 투명 유리로 바꿨는가 하면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등 ‘엄마손 경영’도 잊지 않았다. 취임 직후 직원들의 월급을 10% 인상하고 퇴직하거나 유고를 당한 임직원들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했다. 직원들의 마음을 다잡은 이어룡 회장은 대신송촌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이념을 실천하는 등 시아버지인 양재봉 창업 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이 경영을 맡은 이래 불거진 라임자산운용펀드 환매 중단 사태에 따른 고객 손실분도 분쟁조정위원회의 권고안을 수락하면서 일단락 됐다. 한동안 대신증권의 골칫거리를 해소한 것이다.
 

이어룡 대신파이낸셜그룹 회장(왼쪽)과 박승우 삼성서울병원장이 서울시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후원금 전달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신파이낸셜그룹은 연내 자기자본 3조 원을 넘겨 종합금융투자 사업자 즉 종투사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서울 을지로 사옥마저 판다고 공시한 상태다. 내년 상반기 중 종합금융투자 사업자를 신청한다는 목표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사회 의장으로 올해 초 취임한 3세 경영인인 양홍석 부회장의 경영인으로서의 착근도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대주주라 3세 총수로 등극하는 것은 시간문제지만 아직은 경영 능력이 검증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1981년생인 양홍석 부회장은 현대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일찍부터 대신증권 경영에 참여해 어머니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아 온 것은 사실이다. 이어룡 회장은 일찍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경영 수업을 시키고 있다. 리츠와 대체 투자 부분에 어떤 성과를 내느냐도 이 회장의 경영평가를 가름하는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손자회사인 디에스한남에서 개발해 대박을 터뜨린 ‘나인원한남’과 같은 리츠 개발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도 관건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변화무쌍한 증권업을 맡아 종합융그룹으로 성장시킨 이어룡 회장의 얘기는 재벌 총수 미망인들에겐 하나의 로망이나 다름없다. 조용한 ‘엄마손 경영’으로 주목받는 그의 경영관과 앞으로의 행보는 재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훗날 경영사학자들이 이어룡 회장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글 홍성추(본지 회장) 사진 Queen DB, 뉴스1

홍성추 언론인

필자는 서울신문 기자 때부터 30년 넘게 재벌가를 취재해 온 재벌 전문기자. 서울신문 산업부장 때 기획 연재한 ‘재벌가 혼맥 인맥 대 탐구’는 재벌집안의 이면사를 다룬 최초의 기획이었다. 이 기획은 나중에 ‘재벌가맥’으로 출간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재벌 3세를 정면으로 다룬 저서 ‘재벌3세’와 논문으로 ‘재벌가 분쟁 유형 연구’가 있다. 국내 최초로 재벌가 이야기를 다룬 유튜브 채널 ‘홍성추TV'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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