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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칼럼]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
[여성 칼럼]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
  • 이복실
  • 승인 2023.12.17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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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일이 첫 출근이에요.”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긴 세월을 묵묵히 버티어낸 딸이 대견하고 기특하다. 그러나, 아직 사회 초년생이다. 지금까지 버티어온 시간보다 앞으로 버텨야 할 시간이 더 많다. 그러나, 주변 환경은 녹록하지가 않다. 금년에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우리나라 성평등 지수가 146개국 중 103위라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성평등 지수가 낮은 이유는 여성의 정치, 경제, 사회 참여가 저조하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의 여성 임원 현황을 보자. 한 자리 숫자이다. 매출 상위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은 2020년 4.6%, 2021년 5.5%, 2022년 6.3%, 2023년 6.7%로 나타났다. 해를 거듭해도 증가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나마 이 숫자는 비상근 사외이사가 포함된 숫자이다. 사외이사를 제외하면 이 통계는 더 내려간다. 공직도 마찬가지이다. 정부 부처 내 여성 고위공무원 비율은 8.2%이다. 과장급 21%에 비해 고위공무원 여성의 수는 현저히 적다.

지난 추석 연휴에 나는 자카르타에 있었다. 아시아생산성기구(Asia Productivity Organization)에서 주최하는 여성 리더십 세미나에 참여하였다. APO 회원국 19개국 104명이 참가한 대규모 세미나였다. 참가자들은 학계, 경영계, 여성단체, 정부 기관 등 다양했다. 나는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과 해결방안’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내 발표를 듣고, 청중에서 한 분이 손을 들었다. 파키스탄의 코랑이 지역 여성상공회의소(Women Chamber of Commerce and Industry Korangi) 설립자 겸 회장인 사히브자디 만 칸(Sahibzadi Mahn Khan)은 “한국의 여성 임원 수가 이렇게 적은지 몰랐다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파키스탄을 포함하여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주변국들의 여성 고위직 비율이 낮은 것은 이해가 돼요. 그런데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인, 경제가 발전한 한국이, 성평등 지수가 이렇게 낮다니 깜짝 놀랐어요.”라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장벽은 대체로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개인적 요인, 조직의 문제, 그리고 사회 문화적 요인.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 가지 요인은 세대와 지역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공통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남성의 일’에 가치를 두는 사회 문화적 요인

사회 문화적 요인은 성별에 따른 역할과 고정관념을 의미한다. 고정관념 때문에 ‘바깥 일’은 남편의 일이고 ‘집안일’은 아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남성이 리더 역할을 수행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여겨 ‘남성의 일과 승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사회 문화적 요인의 힘은 막강하다. 이러한 관념이 여성에게 사회화되어서 때로는 여성 역시 자신의 목표를 과소평가하고 본인의 역할을 하향 조정한다. 가사와 육아를 여성에게 집중시켜서 경력단절 현상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고쳐야 할 것은 제도이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제품 기획과 마케팅을 의미하는 '쉬코노미(SHECONOMY)' 개념을 처음 고안한 노르웨이 사우스이스턴대학교 벤야 스티그 파거란드 교수는 11월 초 UN WOMEN 성 평등센터가 주최한 ‘서울 성 평등 대화’(Seoul Gender Equality Dialogue) 기조연설에서 “고쳐야 할 것은 여성이 아니라 제도예요.”라고 강조했다. “아직도 여성보다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직위에 더 적합하다고 하고, 여성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신화이다.”라고 강조하면서 고쳐야 할 점을 명확하게 적시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여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남녀 동등한 임금과 기회, 유연한 근로조건, 여성리더십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내 안의 유리천장’

개인적 요인은 나의 개인적 특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장벽이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성 역할 고정관념은 나랑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남동생과 남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했다. 가정 내에서도 성차별을 받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엄마가 남동생에게 고기반찬 더 주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것은 ‘남자’라서가 아니라 ‘동생’이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대학을 가거나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거나 모멘텀이 생길 때마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척 싫었다. 왜 엄마는 아들과 딸의 역할을 스스로 다르게 규정하는 것일까. 어쨌든, 결혼 전에는, 직장에 다니기 전까지는 ‘내가 여자라서’ 힘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결혼하여 직장에 다니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엄마의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워킹맘으로서 직장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경력단절이 안 되려면 얼마나 인내해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정말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도전적인 일이다. 육아와 가사로 인한 경력단절 현상을 줄이지 않으면, 여성의 고위직 진출은 여전히 험난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일과 양육의 양립을 위한 기반 시설과 지원을 계속해서 늘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 역할 고정관념이 영향을 미치어, 본인 스스로 성 역할이 내재화된 경우도 많다.

전 페이스북 COO인 셰릴 샌드버그는 저서 『린 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 여성들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면 다음 세대 여성들은 지나치게 실용적인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 여성들이 현실을 너무 몰랐다면 요즈음 여성들은 현실을 너무 잘 안다.” “요즘 여성들은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직업에서 경력을 쌓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첫 번째 세대이다.” 그래서 샌드버그의 첫 번째 조언은 “야망을 가져라.”였다. 샌드버그는 맥킨지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야망의 차이를 설명했다. 2012년도 선도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 4,000명 이상을 조사한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에서 최고위직에 오르고 싶다고 대답한 남성은 전체의 36%인 데 비해 여성은 18%에 불과했다. 이런 사례는 내 주위에도 널려 있다. 여성들은 자기 한계를 긋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은 ‘우리 동기에서 꼭 사장이 나와야 해.’ 그런 생각으로 주위에서 밀어주고 본인은 벌써 사장이 된 듯이 행동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내 앞에 사장 된 사람 없는데 내가 어떻게 되겠어?’와 같은 생각을 하니 스스로 위축되고 도전하지 않게 된다. 아직 소수자인 여성이 ‘야심을 가질 것’은 내 안의 유리천장을 없애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조직에서 일하느냐가 여성 임원이 되고 여성 CEO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조직문화가 중요할뿐더러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기관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기관도 있다. 다양성은 있지만, 이를 포용하지 않는 기관도 있다. 여성 고위직 진출에 대한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양성만 가지고는 안 된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남성 중심의 조직구조와 문화를 지닌 조직에서는 여성 임원 후보를 별로 찾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직적 조직구조와 위계 문화 속에서 리더십을 요구하는 임원에는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일부 조직에서는 다양성을 수용하고 포용성을 장려하기도 한다. 모두가 일하고 싶어 하는, 최고의 조직문화를 가진 기관일 것이다. 이러한 기업은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존중하고 활용하면서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와 지원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조직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 선순환의 구조를 만드니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진 조직이 성과를 낼 수밖에 없다. 안미선 포스코 이앤씨 상무보는 “리더가 되는 과정에선 전문성과 사내·외 네트워킹으로 선후배 동료와 동반 성장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라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남녀 불문 일하기 좋은 조직문화와 가정 친화적 사내 제도들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40년, 일한 세월을 돌이켜보니 내가 제일 잘한 것은 도전하면서 버틴 것이다. 버티지 않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 오늘도 출근했고, 내일도 출근할 딸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여성에 대한 세 가지 장벽’에 대한 글을 썼다. 이 장벽을 깨기 위해, 여성 자신도 노력해야 하고, 조직에서도 다양성과 포용성을 갖춘 조직문화를 구축해야 하고, 사회에서도 성 역할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개선하지 않는 한 여성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것은 험난한 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낙담만 할 수는 없다. 딸들이 마음 놓고 일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내일도 출근하는 딸들 모두 파이팅!

글 이복실(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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