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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칼럼] 힘들 때 멘토가 필요하다
[여성 칼럼] 힘들 때 멘토가 필요하다
  • 이복실
  • 승인 2024.03.16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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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성공한 여성 리더들을 보면 거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일을 잘했고, 탁월한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일은 기본이었다. 또 다른 플러스알파가 있었다. 공감, 균형, 배려심 등 정서적 능력이 뛰어났고, 거기에다가 그녀들에게는 멘토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실, 멘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도 다양한 멘토가 있고, 나도 누군가의 멘토가 될 수 있다.

어제저녁 대학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넘었다. 그녀는 거의 일에 파묻혀 사는 여성이다. 열정이 지나쳐서 때로는 무능하고 속 좁은 상사들이 불편할 정도이니, 이것도 문제라면 큰 문제였다. 그녀가 연락할 때는 뻔하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하소연할 때. 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안 좋은 일 있어? 왜 목소리가 이리 힘이 없어?” 후배는“왜 나는 이렇게 안 풀릴까요? 일만 하고 승진은 다른 사람이 하고.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어요.”라고 울먹거렸다. 그녀는 승진할 때마다 순조롭게 되는 법이 없었다. 항상 힘들었다. 맥 빠질 만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지친다고, 앞이 안 보인다고 평생 일군 직장을 홧김에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어려운 일은 수도 없이 생긴다. 조직 내 소수자인 여성의 경우에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견디고 버티어야 한다. 오늘 중단해버리면 ‘내일의 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억울한 마음에 격앙되었지만, 오늘 밤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길 수 있다.

돌이켜보니 나도 직장생활 30년간 다양한 멘토가 있었다. 가까이에는 가족부터 친구, 직장동료와 선배, 대학교 선배, 사회에서 알게 된 인연들까지. 나도 멘토가 절실할 때는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였다. 이 십 년 전, 보육정책국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정책감사를 세게 받은 적이 있었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였다. 감사를 통하여 보육정책 방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잘못된 점을 찾으려고 하니, 그 과정에서 버티기가 무척 힘들었다. 시간 날 때마다 뜨개질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마침 직장에 뜨개질반이 있었다. 뜨개질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다 잊을 수가 있었다. 초보자의 작품이라 어설프고 울퉁불퉁하여 입을 수도 없지만, 조끼 하나를 완성하였다. 어느 날 저녁 모임에 갔다. 기다리면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선배님이 도착하셨다. 뜨개질하는 나를 보고는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 국장, 무슨 일이 있구나.” 이야기를 듣더니 정색을 한다. “별일도 아닌데 왜 그래. 뜨개질하지 마. 어깨 펴고, 당당하게 다녀. 무엇을 잘못했니?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이건 정부의 방향인 것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할걸.” 그녀의 거침없고 우렁찬 말이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용기를 주었다. “이걸 넘어야 고비를 넘을 수 있는 거야.”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멘토였다. 폭풍우를 이기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만두나. 아까워서 도저히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조언처럼, 시간은 흘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보육정책 방향은 계속 계승되어 현재 보육정책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도 화를 다스리려고 뜨개질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이렇게 나의 경험이나, 나의 주변의 사례를 보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멘토는 필요하다. 보통 멘토라고 하면 거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를 위하여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 내가 터놓고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힘들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다 멘토이다. 그러면 어떻게 멘토를 만들어야 할까?

여성연대의 힘

멘토나 네트워크 하면 남성들을 떠올린다. 우리 사회의 리더나 최고 의사결정자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학연과 지연으로 굳어진 남성의 세계에 여성이 끼어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여성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차라리 여성들과의 연대를 형성해서 여성 인맥을 만드는 것이 빠르고, 쉽고, 효과도 좋다. 나도 여성 멘토가 많다.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만난 첫 모임은 행정고시 출신 여성 사무관들 모임이었다. 1980년대 일이다. 행시에 여성이 합격하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 분이 계셨다. 바로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그녀는 행정고시 1호 합격자로서 2호 후배를 무척 기다리셨다고 했다. 그러나, 7년 후에야 2호 후배가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매년 한두 명씩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전 장관님은 후배들을 초청하여 저녁을 사주셨다. 장소도 정해져 있었다. 시청역 근처 세실. 지금은 다른 식당으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 세실은 식당뿐 아니라 문화공연도 하였다. 전 장관님은 경험자로서 여러 조언을 해주셨다. 지금도 기억하는 말은 ‘겸손하라’였는데, 이 말은 20대 초반의 여성 사무관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덕목이었다. 이렇듯 행정고시 1호 합격자로서 전재희 복지부 전 장관님은 여성 후배들에게 훌륭한 멘토였다. 그 모임은 여성 사무관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지만,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다 힘들구나’라는 동병상련을 느끼게 해주었고, 다른 부처와의 교류와 소통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기

“나의 멘토인 조안리 대표는 책 출판을 기념하여 평소 보고 싶었던 사람 100분을 초청했어요. 저도 그중 하나였어요. 책 제목은 Gratitude(감사)였는데, 정말 책 제목대로 참석자 모두 감사의 기운을 듬뿍 받았지요. 그리고 한 달 후에 돌아가셨어요. 정말 그녀다운 이별이었어요.”라고 나의 지인인 박찬희 전 스타벅스 홍보실장은 회고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훌륭한 롤모델이었고 멘토였어요. 그런 분은 없어요. 이런 멘토가 있었던 건 제게 행운이자 축복이죠.”라고 이어서 말했다. “5년 단위로 생각하라 하셨죠. 그러면 비전이 보이고, 직면한 문제들이 사소해 보인다고요.”라고 박 실장은 아직도 그녀가 해준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 조안리 대표는 우리나라 홍보계의 1세대 선구자로 업무성과와 명성을 쌓은 셀럽이었다. 나는 그녀를 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지인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행사나 모임에 가게 되어 많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모임에 가서 명함을 주고받고 하는 것만이 네트워킹은 아니다. 나도 모임에 가서 많은 명함을 교환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명함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기억이 안 날 때가 많다. 하지만, 여러 만남 속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상대방을 진정성 있게 대하면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연다. 내가 존경하는지 싫어하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이렇듯 진정성 있게 다가간다면, 좋은 인연을 만날 확률도 커지고, 좋은 인연 속에서 네트워크와 멘토가 생기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털어놓을 사람 또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할지 조언을 받을 사람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자.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평소에도 나는 직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딸들에게도“멘토를 만들고 롤모델을 찾아라.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그분들은 너의 헬퍼가 될 것이다.”라고 늘 강조하고 있다.

승진이 안 된다고 하소연하던 후배가 오늘은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멘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내게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아마도 나의 멘토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글 이복실(전 여성가족부 차관)

 

이복실은…
전 여성가족부 차관,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
서울 시립대 도시행정학과를 졸업,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에서 교육학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여성으로서 네 번째 행정고시 합격자이다. 30년간 중앙부처에 재직했으며,
2013년 여성가족부가 설립된 이래 최초 여성 차관으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여자의자리 엄마의 자리>,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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