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5:20 (토)
 실시간뉴스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한 아이 16 [서상정 선생님]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한 아이 16 [서상정 선생님]
  • 김도형
  • 승인 2024.02.19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인시장흑백사진관 김도형 사진작가 첫번째 에세이집 '망원경을 가지고 싶어한 아이' 온라인 연재
사진: 통인시장흑백사진관 김도형사진작가 (인스타그램 photoly7)
사진: 통인시장흑백사진관 김도형사진작가 (인스타그램 photoly7)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우열반 제도를 실시했다.

지금 일선 학교에서 우열반 제도를 운영한다면 그 학교는 사회적인 큰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시험에 공부를 하고 응시한 기억이 없는 나는 당연히 열반에 배속되어 아침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른 교실로 가야 했다.

스스로 공부를 포기해서 자초한 일이었기에 억울할 것이 없었으나 조례를 마치고 바로 다른 교실로 이동한다는 것이 보통 번거롭지 않았다.

하루는 열반 교실로 이동하는 나를 본 영어 과목 서상정 선생님은 너는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곧잘 했는데 왜 그 모양이 됐냐고 하며 지금도 늦지 않으니 열심히 해서 육사를 꼭 가라고 했다.

운동장을 걸어가며 생각하니 선생님의 말씀이 참 고마웠다.

그때 서 선생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정말로 육사를 갔으면 이 글이 얼마나 드라마틱 했겠냐만 그러지 못했다.

내 비록 공부에 손을 놓았지만 두 번의 번개시험에는 최선을 다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영어과목이었고 또 한 번은 생물 과목에서였다.

영어과목 이순옥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와서 예고도 없이 한 단원 수십개의 단어를 정해진 시간안에 외우라고 했다(이순옥 선생님은 내가 좋아했던 몇 안되는 선생님 중의 한 분이었다. 수업시간에 팝송 'sea of heartbreak' 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광이 지배를 철할 정도, 즉 눈빛이 종이의 뒷면을 꿰뚫을 정도로 집중해서 단어를 외웠다.

곧 정해진 시간이 끝났고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는데 손을 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묻는 단어의 뜻을 하나도 막힘없이 답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본교실로 돌아가니 우반에 속했던 아이들은 모두 내가 영어단어를 속성으로 외웠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선생님이 기어코 우반 수업 중에 그 사실을 밝혔던 것이었다.

보나마나 '열반의 김도형은 잘도 외우는데 우반의 너희들 중에는 왜 못외우는 놈들이 있냐'라는 말씀도 곁들였을 것이다.

생물시간에 있었던 번개시험은 각기병, 구루병같이 비타민이 부족하면 생기는 병명을 외우는 시험이었는데 정해진 시간에 못외우면 운동장에서 무시무시한 기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 한번 집중했다.

시간이 종료되고 못외운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나갔는데 남은 학생은 나 외에 한 명이 더 있었다.

입시가 다가 오면서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바빠졌지만 나는 느긋했다.

나는 대학진학에 뜻이 없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