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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첫 여성 대통령 풀 스토리& 공약 분석
박근혜 첫 여성 대통령 풀 스토리& 공약 분석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1.1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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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한민국, 강력한 리더십의 여성 대통령의 힘으로 정면 돌파해 나간다”


“이번 선거는 국민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려는 열망이 가져온 국민 마음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기간 중 가는 곳마다 신뢰와 믿음을 주신 그 뜻,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국민께 드린 약속 반드시 실천하는 민생 대통령이 되어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습니다.”
당선이 확정된 이후 광화문에 등장한 박근혜 당선인의 첫 일성이었다. 만감이 교차한 듯,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도 박 당선인의 표정은 애써 흥분을 감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자 오랜 기간 자신을 보좌하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이춘상 보좌관을 떠올리는 박 당선인. 그러나 힘든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 준 국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박 당선인의 얼굴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박 당선인에게 닥쳤던 시련과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대 간, 진보와 보수 간 양강 구도에서 치러진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웠던 만큼 투표 종료 후에도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숨 막히는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차범위의 경합이라는 출구조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숨죽이고 있던 새누리당과 지지자들은 초기 예측불허의 레이스가 이어질 때만 해도 자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개표율이 25%를 넘어서면서 승기를 예감했고 결과는 최종 득표율 51.6%, 국민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으며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등극을 앞두고 있다. 이번 대선의 최종 투표율은 75.8%였다. 지난 17대 대선에 비해 무려 10%가 높은 결과였고,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지기만 했던 대선 투표율이 처음으로 반등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그만큼 국민의 여망이 그 어느 때보다 남달랐다는 의미이며, 한편으로 국민 대다수가 대한민국의 위기를 절감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선인의 신분으로 처음 방문한 곳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이었다. 이날 박 당선인은 먼저 현충원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헌화를 한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다. 이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묘역을 참배하는 박 당선인의 곁에는 당 핵심 관계자들이 대거 보좌하며 남다른 각오를 드러내기도 했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다시 청와대 입성을 예고하는 첫 행보였다.

모범생 어린 시절, 운명을 흔든 그날의 사건
박근혜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첫 부녀(父女) 대통령이 등장하게 됐다. 세계적으로 이와 비슷한 사례는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와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전 총리를 비롯해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 총리와 그의 딸 베너지르 부토 전 총리가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불리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과 그의 장녀인 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 전 대통령 역시 흡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치 의원 역시 현재 유력한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각각의 사례들이 모두 우여곡절을 지니고 있지만, 박 당선인의 경우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참담한 시련 속에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52년 2월 2일 당시 육군 중령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사 출신인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첫째 딸로 태어난 박 당선인의 고향은 대구였다. 이번 선거에서 대구 지역의 높은 투표율은 그러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1961년 5ㆍ16 당시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박 당선인은 이듬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에도 성심여중 2학년 때까지 집과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자식들이 특권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방침이었다. 고교시절까지 박 당선인의 성적은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 동창 중 한명은 “항상 노력하고 대통령의 딸이라는 상황을 알고 있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며 고교시절 박 당선인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후 박 당선인은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학교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는 격랑이 일고 있었다. 10월 유신이 선포되며 대학가에는 반정부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었던 것. 박 당선인은 자서전을 통해 “학과공부에 매달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며 고뇌했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결국 이공계 수석졸업을 한 박 당선인은 프랑스로 유학을 선택한다. 외부의 상황이 어찌됐든 그때까지만 해도 박 당선인 개인적으로는 단란한 가정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삶은 1974년 8ㆍ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간첩 문세광에게 저격을 당하면서 첫 시련을 맞이한다. 프랑스 유학을 정리하고 급거 귀국한 박 당선인은 차분하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행하며 아버지를 보좌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개된 박 당선인의 일기 속에는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며 당시의 절박했던 심경이 담겨 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아버지의 곁에 선 박 당선인은 이후 거의 매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하며 국정 운영 전반을 보고 배우게 된다. 하지만 굳은 각오로 시작한 퍼스트레이디 생활도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이 쏜 흉탄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 첫 한마디가 북한의 동향을 묻는 말이었다는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회자되고 있다. 불과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았던 박 당선인은 다시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게 된 운명을 한탄하며 오열했다고 한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양친이 모두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박 당선인과 동생 근령, 지만 씨는 더 이상 청와대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런 박 당선인을 배려해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 하여금 서울 성북동에 주택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또 당시 청와대 비서실 금고에 있던 6억원을 줬다고 한다. 이는 이번 대선에서 박 당선인의 발목을 잡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 박 당선인은 영남대 이사장과 육영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좀처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제5공화국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 5공 정권은 박 전 대통령 격하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여서 지인들은 박 당선인에게 외국으로 잠시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지만, 이를 거부한 채 인고의 세월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1988년부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박 당선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는 등 아버지의 공과 위상을 재정립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그 이듬해 처음으로 공식적인 아버지의 추도식을 거행한 박 당선인은 “수년간 맺혔던 한이 풀렸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놓고 동생인 근령 씨와 대립하다 결국 1992년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이후 한동안 홀로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선 박 당선인은 각지를 여행하고 글을 쓰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40대를 맞이할 때까지 여러 차례 정치 입문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사양했다고. 결국 정치 입문을 결심한 것은 19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놀라운 정치 수완을 발휘하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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