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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선수생활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말하다. 은퇴 현장에서 만난 ‘역도여제’ 장미란의 출사표
15년 선수생활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말하다. 은퇴 현장에서 만난 ‘역도여제’ 장미란의 출사표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2.2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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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수들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쿨하게 웃으면서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이곳에서 서니 눈물이 나네요.”
고양시청 내 체육관에 열린 은퇴식에서 장미란은 인사말에서부터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쉬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어렵게 인사말을 마친 장미란은 미리 준비한 원고를 꺼내들고 은퇴의 변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15년 역도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장미란의 눈물은 원고를 읽는 내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멋쩍은 웃음으로 감정을 추슬러 보기도 했지만 그간 인생의 전부였던 역도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 듯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장미란은 자신의 역도인생을 행복하게 끝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러고는 은퇴를 결심하기까지의 숱한 고민과 가족들과의 상의 끝에 내린 은퇴의 이유, 그리고 향후 활동 계획까지 그간 밝히지 않았던 허심탄회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았다.

3개월간 심사숙고 끝에 내린 은퇴 결정
장미란은 작년 런던올림픽과 전국체전을 앞두고 향후 거취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특히 선수생활 지속과 은퇴의 기로에서 뜻하지 않게 은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장미란 스스로 큰 부담감을 느꼈다고 떠올렸다.
“선수라면 누구나 은퇴를 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게 되고 그 결정을 내릴 때는 많은 고민과 걱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위기 자체도 은퇴를 하는 분위기로 흘러가서 ‘더 좋은 기록으로 은퇴하겠어’라는 오기가 생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은퇴문제를 두고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했지요. 3개월 정도 향후 거취를 두고 고민했는데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정말 심사숙고했고 결심을 굳힌 건 최근의 일이예요.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제 마음으로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제 몸 상태와 연관 지어 최선을 다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봤는데 사실 자신이 없었죠.”
장미란에게 은퇴는 ‘역도여제’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선수로서의 혜택을 포기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장미란 역시 꿀맛처럼 달콤한 ‘역도 간판스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터였다. 이처럼 장미란은 절망과 같은 은퇴라는 단어를 스스로 용인하기까지 내적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은퇴 쪽에 무게를 두고 선수생활을 정리하다 보니 ‘아 이제 나는 끝인가’하는 괴로움이 컸어요. 오랜 기간 선수생활만 해온 제가 다른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꿔 생각해보니 이게 저의 새로운 인생 2막을 여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걱정과 두려움의 시간들이 사라졌고 저의 마음에는 매우 큰 기대 들이 가득차기 시작했죠. 용인대학교 박사과정과 장미란재단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 그리고 올림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겠다는 큰 비전을 품게 되니까 모든 게 설렘으로 바뀌어 가더라고요.”

지난 15년 되돌아보니 ‘누구보다 행복한 선수’
강원도 원주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장미란은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운동보다는 피아노와 예쁜 그림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소녀였다. 역도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면서부터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상황에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성적이 급격하게 추락했다. 선망하던 고등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자 장미란은 역도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역도 입문’ 제안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역도를 시작한 장미란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세의 나이에 출전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것은 물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역도선수권 1위의 자리를 3번 연속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장미란의 역도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세계신기록으로 여자역도 75kg 이상 부문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역도사를 다시 쓰는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최고의 상을 거머쥐며 세계 역도계를 쥐락펴락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하지만 장미란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면서부터다. 장미란은 지난 2년간 부상과 후유증, 그리고 교통사고 등으로 전성기 시절의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런던올림픽에 출전해야만 했다. 메달권에서 벗어난 4위의 기록은 최고의 길만을 걸어온 장미란에게는 더 없이 쓰라린 결과였다. 하지만 장미란은 런던올림픽 이후 국민들의 진심 어린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런던올림픽 이후를 꼽고 싶어요. 장미란을 마음으로 응원해주고 이해해준 많은 분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죠.”


1 2012 런던올림픽에서 최종 4위가 결정된 이후 기도하는 장미란의 모습.
2 장미란의 가족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역도선수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생 장미령, 아버지 장호철 씨, 어머니 이현자 씨.)
3 비전을 말하던 장미란의 얼굴에서 웃음이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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