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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영상학과 교수로 임용된 영원한 국민 앵커 신은경의‘인생긍정론’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영상학과 교수로 임용된 영원한 국민 앵커 신은경의‘인생긍정론’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3.03.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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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텔레비전이 막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는 ‘9시 뉴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지금과 달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뉴스 앵커는 국민에게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국민 앵커’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당시만 해도 방송 앵커는 ‘국민 앵커’로 불리며 스타급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는 1981년에 KBS 아나운서가 되어 10여 년간 9시 뉴스 앵커로 활약한 신은경 교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뉴스 앵커로 활약한 덕분에 그이는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 앵커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그이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과감하게 회사를 휴직한 후 영국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당초 1년으로 계획했던 유학생활은 석사학위에 대한 강한 의지와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1년 더 연장됐고, 결국 회사에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그이의 인생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스승에게 진 빚을 제자들에게 갚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한 길만 고집했을 것 같지만, 사실 유년 시절 그이의 꿈은 의사였다. 만약 적기에 선물처럼 다가온 두 명의 스승이 없었다면 그이는 의사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재능을 알아본 그이의 스승은 여자고등학교 전교생을 대표하는 아나운서로 활동하도록 도움을 줬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아나운서로서의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 못했던 그이는 지금도 그 스승을 ‘인생의 은인’이라고 말한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자녀들과 나이가 비슷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제 삶을 돌아보면 스승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아요.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사느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거든요. 사실 제가 아나운서가 된 건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의 역할이 컸죠. 진명여고 재학 시절 저더러 앞으로 나와서 책을 읽어 보라던 선생님은 많은 동급생이 보는 앞에서 ‘학생 여러분, 참 듣기 좋죠’라며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 날 이후 공식적으로 진명여고의 아나운서가 되었고, 각종 학교 행사에 아나운서로 나서게 되었죠.”
자신을 인정해주는 스승으로부터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대중 앞에 서서 방송 출연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나운서 도전을 머뭇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희망의 싹을 확인한 그이는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학업 성적이 다소 부진했던 탓에 1차 탈락의 고배를 맛본 후 다행스럽게 2차 합격의 기쁨을 얻게 됐다. 숙명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한 그이에게 또 한 번의 중요한 스승이 찾아왔다. 영자신문사에서 세 명의 학생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던 그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지도교수였다. 그 스승은 매주 토요일마다 영자신문사에서 활동하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승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이는 “빚을 졌다”고 언급했다. 결국 그는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조금씩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간 것이다.


“조응국 교수님이라는 분이 아무 것도 아닌 저희를 정말 믿음 하나로 지켜봐주셨어요. 대학교에 다니면서 영자신문사에서 일했는데 영자신문사 소속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수님께서 주말마다 영어 공부를 시켜주셨거든요. 하지만 당시 교수님의 기대치에 못 미친 채 수업시간마다 지각을 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부족하고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대학 4년 내내 빚을 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제 곧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데, 저를 편한 멘토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학생들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엄마처럼 지도하면서 좋은 인품을 가진 학생들로 만들고 싶어요. 솔직히 과거에 선생님들께 진 빚을 학생들에게 갚고 싶다는 마음도 크고요.”

최고의 앵커에서 정치에 도전하기까지
12년간 뉴스 앵커로 활약한 그이는 최연소 앵커와 최초의 단독 여성 앵커라는 국내 앵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방송국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9시 뉴스 앵커 자리를 꿰찬 그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운이 좋았다”고 했다. 당시 뉴스를 진행하던 선배 여자 앵커가 결혼 문제로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개편 시기가 맞물렸던 것. 방송국 내부에서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얼굴을 찾아야 했고 최종적으로 그이를 앵커로 낙점했다. 방송국과 그이 모두에게 모험과도 같은 시도였다.
“입사를 해서 세 달 동안 연수를 마치고 처음으로 맡은 일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5분 정도 야외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이었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프로그램을 하고 방송국으로 들어왔더니 아나운서실이 긴장감으로 가득한 것을 직감할 수 있었죠. 실장실로 들어오라는 말을 전해 듣고 사실은 방송을 잘 못해서 혼나는 줄 알고 들어갔더니, ‘9시 뉴스를 진행해보라’고 말씀하셨어요. 방송국에 입사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기대했던 순간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날 바로 결정이 되어서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헤어스타일을 단정하게 가다듬고 옷도 빌려 무작정 뉴스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 저녁 9시면 어김없이 그이는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뉴스를 전달했다. 그이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창 뉴스를 진행할 때는 세간의 관심을 많이 부담스러워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데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한창 뉴스를 진행할 때는 아쉬움이 많았어요. 사람들한테 알려진 상태라 꼼짝을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출근을 해서 하루 종일 회사에 있다가 저녁 뉴스를 마쳐야 일과가 끝이 났거든요. 그래서 밖에 나갈 시간도 부족했지만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부담스러웠죠. 그걸 감수하고 당당하게 밖에 나갈 용기도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평일이나 주말 할 것 없이 일에 계속 묻혀 살았던 시간이었어요.”
그러던 1992년 그이는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일을 하며 한국외국어대학 통역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적이 있지만 1년 휴직을 하고 유학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 새로운 도전이었다. 유학을 떠날 당시 그이는 ‘유학 후 복직’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감하게 사표를 제출했다. 방송인으로서의 커리어보다 배움을 향한 갈망이 더 컸기 때문이다.
“유학을 떠나면서 원래는 복직을 하려고 휴가를 낸 건데 박사과정을 어느 정도 해보고 나니까 10년 지나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고 결국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회사에 사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그 당시에 사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건 방송은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계속 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고, 앞으로 회사 조직 내에서 뭔가 이루고자 했던 특별한 욕심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아나운서로서 자리를 지키고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한 욕심이 덜했던 것 같아요.”


유학을 마친 후 그이는 18살 연상의 박성범 전 의원과 결혼했다. 이후 일보다는 정치인 아내로서 내조에만 전념했던 그이는 15년간 남편의 정치활동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이론으로만 접했던 정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대한 경험을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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