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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이 말하는 ‘국악의 힘’
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이 말하는 ‘국악의 힘’
  • 백준상 기자
  • 승인 2014.04.26 0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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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이 처음 대금을 잡은 때는 1962년이다. 처음부터 국악이 좋아서 잡은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대금을 불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별 생각 없이 대금을 잡았다. 그러나 그때는 미처 이 선택이 평생의 업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의 50여 년 국악인생.

취재 이시종 기자 | 사진 양우영 기자

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을 만나러 국립국악원으로 향하던 날 비가 내렸다. 우면산 부근에 자리 잡은 국립국악원에는 어떤 공연을 준비하는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빗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음악가락이 제법 운치 있었다. 그 소리에 취해 잠시 멍하니 섰다가 약속시간이 다 된 것을 알고 부리나케 원장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지각만은 면했다. 이동복 원장이 인자한 웃음으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그는 지난 2011년 11월 제17대 국립국악원장으로 취임했다.  50여 년간 국악계와 인연을 맺어온 그는 그 누구보다 국악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국악의 우수성과 국악의 대중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국악은 한민족을 엮는 원형질

요즘 현대인들은 영화, 음악, 드라마 등 각종 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반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얼을 잇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은 나날이 침체되고 있는 현실이다.
“한심하게도 요즘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제강점기 사상이 녹아들어 우리 음악의 뿌리를 뒤흔들고, 학교 교육에서도 국악이 홀대받고 있는 실정이에요. K팝 등 우리 문화콘텐츠가 경쟁력을 가지고 세계로 뻗어가는 이때 정작 나라의 음악인 국악은 여전히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역할이 정체돼 있어요.”
이 원장은 최근 국악이 처한 현실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국악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은 넓어져 가곤 있지만, 여전히 국악은 국내 음악에서 주류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분단 현실에서 남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국악만한 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사람들도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면서 노래는 우리처럼 아리랑을 불러요. 사상과 이념이 달라도 한민족을 묶어 주는 원형질이 음악인 거죠. 그 정체성을 확보하는 근원을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국악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70년대 말 국악원에서 대금 연주자로 활동한 이동복 원장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국악원에 다시 오게 됐다”고 말했다.
1962년부터 대금을 배웠다는 그는 가난 때문에 진학이 어려웠지만 국립국악사양성소(현 국악중·고등학교)에서 국비 장학금을 받아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뒤 국악원에 들어갔다가 대학(경북대 국악과 교수)으로 적을 옮겼고, 30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30년 만에 국악원에 돌아와 2년째를 보내고 있는 소희를 이렇게 밝혔다.
“국립국악원은 그 사이 거대한 조직이 됐더라고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작 국가대표 브랜드가 돼야 할 국악이 정체돼 있더군요. 그때부터 정체된 국악을 조금이라도 활성화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국악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

국립국악원장으로서 2년을 보내는 동안 그가 국악 활성화를 위해 해온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그는 국악의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국악인으로 국악의 위상 제고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준 높은 공연을 통해 국악 발전에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국립국악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문묘제례악’은 중국에서도 배워 갈 정도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면서 “수준 높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려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국악원의 꽃은 누가 뭐래도 최고 실력을 갖춘 연주단원들이죠. 계속해서 연주단원들의 기량을 더욱 향상시켜 격조 높은 예술을 보여주고 국제적인 활동도 늘릴 계획이에요.”
그는 현대음악과 국악을 접목한 공연을 통해 국악 알리기에도 온힘을 다했다. 2012년에는 가수 싸이와 국립국악원이 함께 2012년 런던올림픽 국악 응원가를 만들기도 했다. 이는 ‘오성과 한음(오천만 국민의 성원을 한국의 음악으로)’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며 국악으로는 처음으로 응원가를 만든 사례이기도 했다. 응원가였던 ‘KOREA’는 싸이가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하고 국립국악원의 창작악단이 편곡, 연주했다.
“대중음악에는 무지한 편이라 싸이가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같이 작업을 해보니 매우 괜찮은 청년이더라고요. 정말 성심성의껏 작업을 해줬어요. 이렇게 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녹아든 작업이었죠.”
국악과 현대음악의 접목 외에도, 국악기 전시나 국악아카데미 운영을 통해 국악 알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학자 출신인 그는 아이들이 보다 쉽게 국악을 배우는 것에도 관심이 높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국악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국악 교육자료를 더욱 체계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교육용 국악 웹사전에 국악 표제어를 충실히 담고, 동영상·음향·이미지 등 기록물을 차근차근 공개할 예정이다.
“우리 국악을 알리는 데에는 뛰어난 공연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백지 상태일 때 교육을 해야 그만큼 흡수율도 높기 때문에 어릴 때 국악을 많이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에요.”

국악이 정규교육에 포함돼 있지만 실제로 교과 시간에 국악을 충실히 배우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 교사들도 국악에 대해 많이 모르기 때문에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다. 이에 이 원장은 단계별 교육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가야금이나 단소 같은 악기를 배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소금과 같은 쉬운 악기로 국악의 재미를 끌어 올려 점차 심층화되는 단계별 교육을 해야 해요. 정규교육에 국악이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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