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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가톨릭 성직자의 요람, 용산신학교 & 원효로성당
조선 가톨릭 성직자의 요람, 용산신학교 & 원효로성당
  • 이시종 기자
  • 승인 2014.10.05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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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간을 품다 17

용산신학교 & 원효로성당

글 사진 백남우(tbs TV 영상콘텐츠부장)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재청

▲ 원효로 성당 외부 전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에 자리 잡은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엔 100년을 훌쩍 넘긴 고색의 고딕 원효로 성당이 있다. 경사진 땅에 그대로 세워져 오르는 곳에선 3층처럼 보이지만 성당을 따라 돌면 어느새 2층의 후면을 마주한다. 원효로 성당의 시작은 성당 뒤편에 있는 2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에 있다. 지금은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옛 용산 신학교. 현존하는 국내 최초의 신학 건물이다.
부속 성당은 신학교의 필수 시설. 애초 학교 건물에 성당을 마련했지만 학생들이 늘어나자 기도와 묵상의 장소로 쓰일 독립 건물의 신축이 필요했다. 신학교 건물이 건립되고 무려 10년 후인 1902년, 신학교의 부속 성당인 원효로 성당이 탄생한 배경이다.

▲ 1892년 소신학교 교사 신축
▲ 1911년 대신학교 교사 신축
먼저 사적 제520호로 지정된 용산신학교(정식 명칭은 용산예수성심 신학교)를 살펴보면 1891년 5월 정초식을 갖고 1892년 6월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양옥건물이다. 건물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총괄했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했다. 건물은 고딕 양식에 붉은 벽돌을 사용한 단순한 구조이며, 벽면의 대부분은 커다란 아치창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학교 건물이 갖는 특색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명동성당 주교관도 이와 유사한 구조인 것을 보면 당시 설계를 담당했던 코스트 신부의 건축이 갖는 공통된 특징인 듯하다.
그 뒤 1928 년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옮겨 가면서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로 이용되었는데 1956년 한국에 진출한 성심수녀회의 수녀원에 양도되어 지금까지 수녀원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 1902년 세번째 고딕성당 원효로성당 건립
신학교의 부속성당이었던 원효로 성당(서울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사적 제521호)은 1899년에 착공, 1902년 준공되었는데 이 성당 역시 코스트 신부가 설계했고, 1886년 프랑스와 통상 외교 조약이 체결되면서 100년간에 걸친 조선의 천주교 박해정책이 막을 내리고 약현성당 (1892년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고딕 성당), 명동성당(1898년 건립된 두 번째 고딕 성당)에 이어 1902년 세 번째 고딕 성당인 원효로 성당이 건립된 것이다. 고딕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절충식으로 붉은 벽돌이 주를 이루며, 군데군데 회색 벽돌이 들어가 있다.
정면은 비대칭, 창문은 아치형을 이룬 한국 근대식 성당의 본보기 중 하나로 꼽힌다. 건물의 내부는 제단과 예배석만 있는 단순한 교회 형식이지만, 뾰족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 위의 작은 뾰족탑은 전체적으로 약식화 된 고딕풍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건물 안쪽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영문 이니셜인 ‘A. K.(Andre Kim)’와 생몰연대(1821~1846)가 기록돼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1942년까지 이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가 지금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대성당 제대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궁벽한 시골을 떠나와 조선인 성직자를 배출하기 시작한 용산 원효로 옛 신학교는 여전히 그날의 희망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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