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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의 큰 산맥, 미당 서정주의 집
한국 시의 큰 산맥, 미당 서정주의 집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04.28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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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⑫

 

       ▲ 미당 서정주의 집 전경

올해는 한국 시의 큰 산맥 서정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 위치한 미당 서정주의 집(봉산산방)은 시인이 작고할 때까지 머물던 창작 산실로 곳곳에 그의 문학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국내 유일의 미당 창작 산실, 바로 여기서 시인의 주옥 같은 시들이 탄생했다.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자료제공 관악구청

단군신화에서 따온 집 이름 ‘봉산산방’

미당 서정주의 집은 서정주 시인이 1970년부터 2000년 타계 시까지 30년간 살던 집이다. 한동안 방치돼 오던 미당의 집은 그가 숨진 지 10년 만인 2011년 복원되었다.
이 집의 원래 이름은 ‘봉산산방(縫蒜山房)’이다. 미당이 직접 지은 명칭으로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으면서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왔다. 우리 민족 신화의 원형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미당의 창작 산실인 이 곳은 시인 생애의 마지막 집필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팔할이 바람>, <산시> 등 주옥같은 시집들이 이 곳에서 탄생했다.

시인의 명저와 생활 유품이 전시된 공간

미당의 집은 24평 남짓의 아담한 2층 집으로, 총 60여 점의 미당 주요 저서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옷, 모자, 가방, 지팡이, 안경, 파이프, 여권 등 시인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생활 유품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뜰은 아담한 정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내부에 전시된 사진을 통해 평소 미당과 그의 아내가 뜰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미당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 <내 아내>, <늙은 아내의 시> 등 아내에 대한 여러 편의 시를 짓기도 했다.
1층 전시실에는 미당이 즐겨 입던 한복과 조끼 등 의류품과 나들이 길에 함께한 지팡이 등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당은 양복을 입을 때는 나비넥타이 등 다양한 넥타이와 모자, 지팡이로 세련된 노신사의 기품을 잘 보여준 멋쟁이였다. 평소에는 2층 서재에서 지냈으나 거동이 불편해진 뒤에는 지금의 이 전시실 공간에서 머물렀다.
2층 방은 미당의 서재 공간이다. 시집 <동천>(1968) 이후의 작품을 이 방에서 썼다. 난초와 가야금, 맥주와 파이프 담배를 좋아하던 시인의 방에는 수많은 책과 도자기, 지팡이, 그리고 벼루와 먹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관악산이나 구름을 바라보다가 뜰에 피기 시작한 매화나 목련, 개나리, 진달래를 보고 또 보고 한참 바라보다가 집 옆의 사당초등학교 아이들의 합창소리에 즐거워하곤 했다.
미당의 육성과 모습이 담긴 영상물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 이 곳은 문학단체의 학습공간과 소규모 행사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현존하는 미당 유품은 50년간 간직한 10권의 시 창작노트부터 아내의 손톱을 깎아주던 손톱깎이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수가 방대해 총 2만여 점에 이른다. 시 창작 노트 속에는 미 발표작들이 빼곡하며, 영문학과 불문학 공부 과정을 보여 주는 필기들이 있다. 수천 통의 편지와 사진들, 주요 일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각종 메모는 그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미당의 유품들은 개인 유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진,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하나인 미당의 전 생애를 보여 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큰 것이다.

20세기 한국 시사를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
문학적 업적과 역사적 과오에서 논란의 대상 되기도    

서정주 시인의 호는 미당(未當)이다. ‘덜 된 집’, ‘아직은 조금 부족한 사람’이란 뜻으로 ‘늘 소년이려는 마음’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겸손한 마음과 소년 같은 마음으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 시인의 삶, 생이 다하는 날까지 늘 만족 없는 탐구를 꿈꾸었던 그의 시정신과 잘 어울린다. 특히 미당은 ‘로댕’처럼 부르기 쉬운 그 음운을 좋아했다고 한다.
미당은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전시체제 때 창씨개명을 하고 근대교육까지 받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당은 <자화상>(1939)을 통해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다’라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하나 실제로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당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안군 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광주학생운동 주모자로 퇴학했다. 그 후 만해 한용운의 지인이면서 육당이나 춘원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준 석전 박한영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가 그의 권유로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불전에 입학했다.
그 후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에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전쟁을 찬양하고, 당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적을 남겼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파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며 이른바 순수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파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미당은 약 70년의 창작기간 동안 한국시사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처녀시집 <화사집>(1941)부터 83세에 펴낸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총 15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천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동어 반복을 싫어해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그는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대상,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쓴 현역 시인이었다.
미당은 우리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과 그의 고향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시 언어로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일제 강점기 친일 작품 발표와 독재정권 지지 및 찬양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동양 사상과 민족 정조 바탕의 작품세계

미당은 <벽>으로 등단해 같은 해에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시집 <화사집>(1938)은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으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해방 후 두 번째 시집 <귀촉도>(1948)를 발간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은 동양적 사상으로 접근되어 심화된 정서와 민족적 정조를 나타냈다.
<신라초>(1961) 이후부터는 불교 사상을 기조로 신라의 전통과 불교 세계의 심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작품들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었고,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로 이어져 불교의 세계를 한층 심화시켰다. 그의 시 사상의 바탕은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낭만주의와 심미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미당은 19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았다. 특히 90년대에 펴낸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80 소년 떠돌이 시>는 만년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했다.
그를 종합적으로 대표하는 작품 <국화 옆에서>는 한국 시사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미당 서정주의 집

위    치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56나길 4(남현동)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및 추석연휴
관람시간 : 09:00~18:00
관 람 료 : 무료
문    의 : 02-879-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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