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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통일에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생가를 가다
독립과 통일에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생가를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5.10.28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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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16
▲ 몽양 여운형 가옥 전경

몽양 여운형 선생은 외세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념의 대립을 포용하고 단일 국가를 꿈꿨던 선생의 모습을 온고지신 삼아, 현재와 미래의 참된 국가상을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자.

진행 김이연 기자|사진 양우영 기자

시대를 앞서 간 민족 지도자 몽양 여운형
자신의 집에 광동학교 설립해 신문학 교육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은 폭넓은 시야와 치밀한 현실 인식을 갖추었던 민족 지도자이다.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선구적 실천가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주역 중 한 명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이념 분쟁을 넘어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애쓰다 불의의 흉탄에 쓰러졌다. 비극의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진정한 민족 지도자였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묘골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는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에 처음 지어졌다. 몽양은 이 집에서 1886년에 태어나 1908년 부친 탈상을 끝내고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23년간 살았다. 해방 전후인 1940년대 초중반에도 종종 내려와 지냈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집이 점차 쇠퇴하여 바깥채 지붕이 초가로 변경되었다가, 6·25전쟁 와중에 부엌만 남기고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 2001년 양평 군민들의 고증으로 원형에 가깝게 생가 터가 정비되었고, 2011년 복원되었다.
몽양은 사랑채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 놓고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1909년에는 자신의 집에 기독교 학교 겸 교회인 광동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몽양은 기독교에 심취하였고, 신학문과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승동교회의 선교자인 클라크 알렌(Charles Allen Clark)의 도움으로 설립하였으며, 양평 내에서는 세 번째로 설립된 교회였다. 이곳에서 몽양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 중 잘 알려진 이로는 새마을 운동의 불씨가 된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가 있다. 그는 우리나라 농촌 운동의 선구자로 평생 가난했던 우리나라 농촌 부흥에 이바지한 계몽가이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몽양과 함께 건국동맹, 농민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집은 기역자 기와집 안채와 기역자의 기와집 바깥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돌층계 위에 자리 잡았으며, 뒷마당에는 디딜방아가 있다. 안채 방안에는 몽양이 속옷 차림으로 앉아서 면도하는 모습의 모형이 설치되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집 안에 전시된 가구들은 1930년대 이후 몽양이 거주한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것들을 후손들의 기증을 받아 전시하고 있다.

몽양의 삶과 정신을 전시한 기념관
서거 당시 혈의, 건국훈장 등 유품 50점 전시

생가 복원과 함께 건립된 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독립운동(1914~1945)’,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서거(1947. 7. 19)’의 4개 시기로 나누어 그의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다. 특히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 장례식에 사용된 만장, 서울 계동 집에 있던 책상, 2008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여 몽양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유족들이 기증한 유품 20점을 비롯해 총 5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과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계몽운동 전개

몽양은 1886년 양평군 신원리 묘골의 함양 여씨 9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치마폭으로 태양을 안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몽양(夢陽)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6세 되던 해인 1900년 배재학당 교사로 재직 중이던 친척 여병현의 영향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 흥화학교와 우무학당 등으로 옮겨 신학문을 익혔다. 한편 기독교에 입교하여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의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알렌 목사 아래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였으며, 1911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기도 했다. 국권이 기울어 가던 1907년경, 몽양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화를 받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강릉의 강릉 초당의숙 교사로 부임하여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 양평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발단의 주축, 몽양 여운형
폭넓은 외교 활동 통해 조선 독립의 당위성 전파

몽양은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본과 국내에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파견했으며, 자신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전 민족적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그 배후의 핵심 인물인 여운형 선생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조선을 독립을 주장해 오히려 그들을 주눅 들게 한 웅변가였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몽양 선생은 도쿄제국호텔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 놓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연설을 했다. 이 외에도 몽양은 일제와 맞서기 위해 중국의 장제스와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등 당대의 혁명가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이 같은 외교 활동을 통해 그는 세계정세를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 징역 3년 판결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좌우의 이념 대립을 넘어선 자주통일국가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의 날이 밝았다. 몽양은 항복을 선언하는 일본 국왕의 라디오 방송 전에 총독부 정무총감을 만나 치안권을 인양받고, 당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장을 맡았다. 다음날 해방을 실감하게 된 수천 명의 군중이 휘문중학교로 몰려들었고, 이들의 요청으로 연단에 오른 몽양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제 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리던 것은 이제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의 영웅주의는 버리고 끝까지 단결로 나아가자.”
몽양의 연설이 끝난 후 비로소 해방을 실감하고 기뻐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도선 분할 점령이 알려지고,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이 전해지자 정치 세력들은 이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때 몽양은 “우리가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친소반미도 친미반소도 해서는 안 된다. 이념은 자주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며 좌우 이념을 넘어선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몽양은 김규식 등과 더불어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양 여운형, 영원히 민족의 가슴에 잠들다

1947년 7월 19일 아침, 몽양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 김용중과 만나 작별 인사를 하고 당시 머무르고 있던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 잠깐 들른 후, 오후 1시경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계동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가 혜화동 로터리의 동소문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건너편 파출소 앞에 있던 트럭이 앞을 막아섰다. 그 순간 두 발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몽양은 그 자리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가 스러진 순간이었다.

“나는 이미 늙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부디 과거의 썩은 기둥을 여러분의 손으로 뽑고,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시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영예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나는 기꺼이 한 줌 거름이 되어 조선의 소나무를 살찌우겠으니,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 여운형

▲ 몽양 서거 당시 입고 있던 혈의

몽양 여운형 기념관 관람안내

주소: 경기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
개관시간(하절기):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개관시간(동절기):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관람요금: 어른 1,000원, 중고생·군인 800원, 초등학생 500원
문의: 031-772-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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