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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율곡 이이의 생가 오죽헌을 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율곡 이이의 생가 오죽헌을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6.06.29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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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인 생가 탐방 24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시킨 율곡 선생의 생가 오죽헌을 방문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16세기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글·사진 김이연 기자

한국 주택건축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보물 제165호, 오죽헌

오죽헌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년)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율곡의 시종사촌 권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집 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나 많다는 의미이다. 한국 주택건축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 중 하나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한 문성사, 어제각, 율곡기념관, 안채, 바깥채 등이 있다. 출입문과도 같은 자경문을 통과하면 건축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자경문은 불법 공부를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갔던 율곡 선생이 오죽헌으로 돌아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정표를 세우고 지은 문이다.
자경문을 지나면 우측에 문성사가 있다. 문성사는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곳이다. ‘문성(文成)’은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이다.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왼편에는 오죽헌이 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 선생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이고, 오른쪽 방은 율곡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태몽인 용꿈을 따서 ‘몽룡실’이라 이름 붙였다. 그 주위로 오죽이 자라고 있으며, 율곡 선생 생전부터 있었다는 600년 된 배롱나무도 있다.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건축양식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샛문을 지나면 안채와 바깥채가 보인다. 신사임당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필적이다. 바깥채와 오죽헌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왼편의 사잇문을 지나면 어제각이 있다. 어제각은 정조임금이 율곡 선생의 능력을 크게 여겨 짓도록 한 것이다.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사용하던 벼루를 궁궐로 가져오게 한 뒤, 그의 학문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했는데, 그 어명을 받들어 지은 곳이 어제각이다. 어제각 내부에는 <격몽요결>과 율곡 선생이 생전 사용하던 벼루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자경문 앞마당으로 되돌아나오면 율곡기념관이 있다. 율곡 선생의 각종 문집과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실린 <율곡전서>를 비롯해 소나무를 보호하는 글귀를 적은 호송설의 탁본, 친필 암석각자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과 8폭 화첩을 비롯한 그림과 그 가족들의 유품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 율곡 선생이 태어난 몽룡실                    ▲ 정조임금의 어명으로 만들어진 어제각에는 
                                                                율곡 선생의 유품인 벼루와 <격몽요결>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 중기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다
십만양병설 주장으로 임진왜란 예견

율곡 선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방대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지방에 향약을 실행하여 미풍양속 문화를 심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율곡 선생은 1536년 12월 26일 강원도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예술가로 유명한 모친 신사임당 사이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6살 때 외가인 강릉을 떠나 본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자랐으며,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6세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정신적 충격으로 머리를 삭발하고 절로 들어갔으나, 불교의 참선으로는 진리의 본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하산했다. 이후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와 유학공부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고 자경문을 지었다. 29세에는 대과에 장원 급제해 호조 정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조 좌랑, 사간원, 사헌부 등 주요 관직을 거치며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48세에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율곡 선생이 국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선조는 다시 율곡을 이조판서로 임명했으나, 이미 건강이 악화된 후였다. 그럼에도 율곡 선생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군대 강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1584년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 완성,
민본정치와 군주의 도덕성을 강조하다

중국에 주자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율곡 선생이 있다. 그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했다. 율곡 선생은 상이한 개념의 이와 기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표현했다. 이(理)란 원리, 진리, 도덕규범으로 이상향과 같은 의미이고, 기(氣)는 추상적으로 풀이되는 이와 다른 ‘현실적 존재’를 일컫는다. 율곡 선생은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기가 있어야 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퇴계 선생과 비교해서 기를 더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본주의 사상을 펼쳤다. 정치의 주체가 백성에 있다는 것이었다. ‘시폐 7조책’에서는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에게 이로우면 모두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기준을 나라와 백성의 편안함과 이익에 두었다. 또한 지도자의 도덕성과 함께 도덕성 제고를 위한 경연(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협의하는 일)을 강조했다.
저서로는 현명한 신하가 군주에게 성학을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성학집요>, 후학 교육을 위해 마련한 정신수양서 <격몽요결>, 17년간의 경연을 신랄하게 기록한 <경연일기> 등이 있다.

* 오죽헌 관람 정보

주 소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관람시간 하절기 08:00~18:00 / 동절기 08:00~17:30
입 장 료 (개인)성인 3천원, 청소년 군인 2천원, 어린이 1천원
휴 관 일 1월1일, 설날, 추석(오죽헌 문성사는 연중개방)
문의전화 033-660-3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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