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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조의 부흥을 이끈 ‘이병기 선생’ 생가를 가다
현대 시조의 부흥을 이끈 ‘이병기 선생’ 생가를 가다
  • 김이연 기자
  • 승인 2016.07.27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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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인생가탐방
 

가람 이병기 선생은 저물어져 가던 우리 시조의 부흥을 이끌었다. 조선 말기에 일본으로부터 나라와 글마저 빼앗길 때, 학술단체를 만들고 한글 교육에 앞장서며 우리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익산의 작은 초가집은 여전히 그의 숨결과 체취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글 김이연 기자 사진 익산시청 제공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작은 초가집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이병기 선생 생가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李秉岐:1891~1968)은 시조의 현대적인 부활을 위한 부흥운동에 이바지한 분이다. 시조 창작은 물론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힘썼으며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고 우리말을 교육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특히 신재효의 판소리 등을 발굴하여 소개한 공로가 크다.
선생의 생가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남아있다. 1891년 변호사 이채의 큰아들로 이 집에서 태어나 1968년 77세를 일기로 역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별세한 후에도 집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의 언덕에 묻혔다. 이 집만이 한국 근대문인의 생가 가운데 단아한 초가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7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고방채, 억새로 지붕을 이은 소박한 정자 등이 남아 있다. 정자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채, 정자 앞 연못을 둘러싼 산수유와 배롱나무, 마당 한 편의 맷돌과 안채 옆의 장독대, 집 뒤편의 대나무밭에 이르기까지 선비 집 특유의 정치와 담백한 멋을 느끼게 한다.
가옥 입구를 보면 승운정(勝雲亭)이라는 모정(정자)이 있다. 그 옆으로 긴 형태의 사랑채가 있고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사랑채는 ㅡ자형이다. 앞면에 툇마루를 구성하고 툇방은 골방, 창고, 다락장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진수당(鎭壽堂이라는 편액이 붙은 끝 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으며,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느 편액이 붙은 방은 평소 기거하던 공간이다. 책방과 수우재의 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다. 두 방 모두 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 공간을 이용해 다락을 만들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를 만나게 된다. 안채는 호남 지방에서 보기 드문 ㄱ자 집으로 축대 위에 높은 주춧둘을 사용해 비교적 높게 지었다.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하고 있다.
건넌방은 모든 면에 툇마루가 있는데, 전면 툇마루는 대청마루보다 높게 구성했다. 윗방의 한 쪽은 칸을 막아 찬방을 두었고, 아랫방 뒤로는 쪽마루를 달아 고방채와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에서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3칸의 고방채에는 광, 헛간, 안변소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둘레 60cm, 높이 5m 정도의 탱자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형과 수세가 좋은 편이다. 수령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선생의 고조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2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은 집채와 그것을 둘러싼 나무와 꽃, 연못, 정자까지 조선시대 선비의 삶이 이것이었을까 한번 쯤 생각해보게 되는 소박하고 고즈넉한 초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이곳에서 별세했다.

시조의 현대적 혁신을 주장,
옥고를 치른 후 관조에서 사회성 짙은 성격의 작품으로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다. 관립한성사범학교에 다니던 중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에게 조선어 문법을 배우고,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문학과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했다. 또한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하고 창작했다. 이때부터 수집한 서책이 방대한 장서를 이루어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해 시조 혁신을 주장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전문학교에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이 되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시조 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시조의 혁신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고 <시조는 혁신하자>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발표했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의 것으로 보고 시조를 현대적으로 혁신하는 시조 혁신을 선도했다. 이 같은 주장과 이론은 1939년 <가람시조집>을 출간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시조집에는 그의 전기 시조집인 <난초> 등 수십 편의 시조가 수록되었다. 자연과 세상살이를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서정적인 정서가 주를 이룬다.
이후 그의 작품에 사회성이 짙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1940년대 중반부터였다. 옥중 작품인 <홍원저조> 등에서 그는 이전까지의 관조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사회와 개인의 갈등과, 현실의 억압, 부조리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시조 창작뿐만 아니라 국문학 연구와 서지작업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고전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작업에도 열중했으며, 판소리 발굴에 족적이 크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중록>, <인현왕후전>, <춘향가>가 있다.

시조는 조선인의 혼이 담긴 국민문학이다, 시조 부흥론

시조 부흥론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결성으로 프로문학이 세력을 확대하자 최남선, 이광수 등 기성 문단이 대항 문학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최남선은 시조가 ‘조선국토, 조선인, 조선심, 조선어, 조선운율을 통하여 표현된 필연적 양식’임을 주장하며 시조를 통해 국민문학의 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이어 이병기 선생은 <시조에 관하여>, <시조와 민요> 등 시조 이론을 구체화하면서 시조론으로 시조의 문학적 의의를 강조했다. 이들은 우리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응결된 시조의 중요성과 부활의 당위성을 강조했으며,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서 연시조나 구별 배항 시조와  같은 새로운 개념의 시조를 선보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 등에 의해 시조 부흥 운동이 주도되었으나, 선생은 시조의 혁신을 주장하며 현대 시조의 구체적 모향을 제시했다. 이론뿐만 아니라 과거 시조에서 볼 수 없었던 세련된 감각과 현대적인 감수성을 보이는 시조를 창작함으로서 시조 부흥 운동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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