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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한옥 마을, 익선동 166번지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한옥 마을, 익선동 166번지
  • 김민주 기자
  • 승인 2017.03.19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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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多
             多
눈에 익은 익
             선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눈이 차분히 덮인 한옥을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 익선동 166번지가 떠올랐다.
생각만큼은 아니었지만, 익선동은 하얗게 눈에 익었다.
눈이 녹으며 한옥이 본연의 색을 찾아가는 동안 익선동은 눈동자가 담긴 눈에 익었다.
그리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을 해득했다.

사진 [Queen 김민주 기자]

내용1
 

 

종로3가역 5호선 4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길 건너 보이는 골목이 익선동으로 향하는 문이다. 그 골목은 비밀의 문 같다. 높은 건물에 둘러싸여 낮게 숨어있는 익선동의 속삭임을 듣는 사람만이 지날 수 있는 신비스런 통로라고나 할까? 이 비밀의 문을 통과하여 조금 걷다 보니 지도 배포대가 반겨줬다. 지도 한 장 꺼내 들고 옹기종기 붙어있는 한옥 사이를 누볐다.

홍차 카페 겸 향수 공방인 ‘프루스트(PROUST)’를 발견했다.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프루스트 현상을 느껴보고 싶었으나 올해 최강 한파로 인해 냄새를 맡을 수도 과거를 회상할 수도 없었다. 얼어버린 감각을 아쉬워하기도 전에 발은 ‘경양식 1920’에 다다랐다. 익선동 한옥마을이 탄생한 1920년을 기념해 이름을 ‘경양식 1920’으로 지었다고 하니 문득 익선동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고려 시대 골목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는데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일까? 알 도리는 없지만, 그 시절의 골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설레서 도보 시간여행을 계속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가까워 왕실 시설이 많았다. 특히 제25대왕 철종이 익선동에서 나고 자랐다. 강화도령이라는 철종의 별칭은 강화도로 귀양을 가서 얻은 것이다. 철종은 임금이 된 후 어릴 때 살았던 익선동에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인 ‘누동궁’을 세웠다. 그래서 익선동은 현대에 이르러 ‘누동궁 길’이라는 지명을 가졌다. 지금은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라져버린 이름이지만….

이런 점에서 익선동은 오묘하다. 과거가 현재에 화석처럼 남아있지만 정작 그 화석을 묻어버리기도 때론 발굴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기생들이 주로 거주했고, 그 영향으로 곳곳에서 한복집을 찾을 수 있다.

내용2
 

 

골목 끝에서 색감이 고운 인물 벽화를 만나 멈췄다. 누구일까? 한국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이다. 놀랍게도 북촌과 익선동의 한옥마을을 모두 건설한 위인이다. 만해 한용운이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던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그가 익선동 한옥마을을 설계할 때, 전통 양식뿐 아니라 서민의 주거환경 개선도 고려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근래의 경향은 일반이 개량식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마는, 개량이라면 별것이 아니라 종래 … 재래식의 행랑방, 장독대, 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1925년 <경성편람> 속 '건축계로 본 경성'에서 그가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익선동의 개량 한옥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다는 등 전통과 근대의 문화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식민지 하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를 설치했고, 환기와 일조권 등도 신경 썼다. 익선동은 서민을 위한 근대 한옥지구였기 때문이다.

북촌은 당대 지주들을 위한 큰 규모의 전통 한옥지구이니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익선동이 낡은 감은 있지만 아늑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잠시 돌아서서 걸어온 골목을 관찰했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익선동이 맞은 변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다. 다시 뒤돌았다. 익선동의 진화를 주도한 정세권이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용3

골목의 끝이어서 방향의 전환이 필요했다. 마을을 크게 빙 둘러보기 위해 왼쪽을 택했다. 큰 도로가 나왔으나 이내 좁은 골목 속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도에서는 끊어져 있는데 실제로는 길이 있는 곳도 있다. 깊숙이 들어가 보니 막다른 대문이 나왔고 카페 ‘식물’로 이어졌다. 들어가서 눌러앉을까 고민했다.

매서운 추위에 굴복하기 직전, 아직 익선동의 절반도 구경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후를 기약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다리타기를 하듯 새로운 골목이 나올 때마다 길을 꺾었다. 곳곳에 전통의 예스러움과 현대의 참신함이 섞여 있는데, 이질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토박이 동네 주민, 새로이 익선동에 터를 잡은 예술가, 익선동 특유의 분위기에 심취한 방문객 모두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좋았다.

같은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흥망성쇠를 살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익선동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익선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다다익선’이다. 철종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효심을 담아 아버지를 모셨다. 정세권은 우리 것을 잃지 않길 바라는 동시에 서민의 삶이 나아지기를 원했다. 현재 모여드는 사람들은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마침 다다익선 스튜디오 앞에 이르렀다.

익선동 기행을 마치며 골목 어귀에서 다시 만난 카페 ‘식물’. 이번엔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들어갔다. 추위에 마비된 몸이 녹자 눈에 익은 익선동이 마음의 눈에도 익었다는 걸 깨달았다.

[Queen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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