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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원, 600년 역사도시 서울의 마지막 보루, 서촌 이야기
건축가 김원, 600년 역사도시 서울의 마지막 보루, 서촌 이야기
  • 김문
  • 승인 2017.04.06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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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째 서촌문화 지킴이
 

환경건축가 김원. 그는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쉼없는 왕성한 활동으로 국내 건축계를 이끌고 있다. 실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옥인동 주민이자 30년째 서촌문화 지킴이로 활약 중인 김원 건축가를 만나 역사 속 서촌의 가치에 대해 들었다.

취재 김문(인터뷰 작가) 사진 양우영 기자

제갈공명의 서재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 있었다.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맑은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편안하고 정숙한 자세로 원대함을 이룬다. 일생동안 좌우명으로 삼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현대 건축사의 큰 획을 그은 고(故) 김수근. 생전에 “건축은 언어가 아니라 벽돌로 짓는 시(詩)”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를 가리켜 ‘한국에서 가장 경탄할 만한 건축가’로 선정했다. 이때 인터뷰에서 “집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수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집은 자궁입니다. 자궁의 집은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집은 가옥이며 집의 집은 환경입니다. 집을 주택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환경입니다. 환경이 철학적으로는 공간이 되겠는데, 공간은 집의 집의 집입니다.”

환경건축가로 유명한 김원(73)씨. 김수근과 김중업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 현 건축계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1985년 일본 가지마 출판사에서 스승이자 선배인 김수근과 함께 ‘세계의 현대 건축가 101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6년에는 ‘문학의 해’를 맞아 ‘가장 문학적인 건축가’에 뽑히기도 했다. 

굳이 작품을 열거한다면 국립국악당, 독립기념관, 서울종합촬영소, 종합전시장(KOEX), 신라민속촌 등 굵직굵직한 건물을 지었고 수상경력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재는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제갈공명의 글귀처럼 맑은 마음으로 편안하게 건축환경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옥인동 일대는 말 그대로 ‘조선·근대의 문학터’

그는 서촌, 그러니까 인왕산 자락 옥인동에 30년째 살고 있다. 김씨는 잠시 서촌의 역사성을 설명한다. 옥인동, 청운동, 누하동, 누상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때 종로구 가회동의 양반들과는 달리 주로 궁에 드나드는 중인들이 살았다. 의관, 역관, 갓 고치는 기술자 등이 기거하면서 위항문화(委巷文化)를 꽃피웠다. 이들은 역관 등을 통해 서구문화를 먼저 접해 비록 중인이지만 의식수준이 높았고 신분 또한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위항시인들은 가난했지만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해 정기적으로 시사(詩社, 60여개의 시동인으로 추산)를 열었지요. 예를 들어 옥인동의 ‘송석원길’은 바로 이 위항문학의 대표적 흔적입니다. 천수경이라는 역관이 살았던 집에는 한 달에 한번 문인들이 모였는데 추사 김정희가 직접 특강을 오기도 했지요. 이때 추사는 이들의 수준에 놀라워하며 ‘송석원(松石園)’이라는 세 글자를 써주었습니다. 이는 바위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 윤동주, 이광수, 이상 등 많은 문학가들이 이곳에 살아 옥인동 일대는 말 그대로 ‘조선·근대의 문학터’인 셈이지요.”

역사의 정신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서촌

 

서촌은 역사도시 서울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면서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서울이 아무리 현대도시, 첨단도시, 문화도시가 되어도 만들어진 지 600년이나 되는 역사도시라는 사실을 중심에 두지 않고는 서울의 전체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개발을 해도, 보전을 해도 역사도시라는 관점에서 개발할 방향이 주어지고 보전할 구역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도시의 흔적은 물리적으로는 우선 서울 성곽과 4대문 안 5대궁에 남아 있지만 사실상 오늘날 그 역사의 정신적 가치를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그러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남은 지역이 북촌과 서촌이라고 말한다. 서촌의 역사적 가치는 한 마디로 인왕산과 계곡, 그리고 거기에 어우러진 한옥이나 골목길, 물길 등 유형의 자산에 있다지만 이 지역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을 되짚어 볼 때 그 가치는 더욱 두드러진다는 설명이다.

서촌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들

서촌 통의동, 준수방(俊秀坊)에 세종대왕 태어났던 곳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우리 5000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장소인데 그런 성지를 밀어내고 아파트를 짓고 살겠다면 그런 패륜이 어디 있느냐는 논쟁이 대두되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거대한 기념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탄생지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고 비석 하나라도 세워서 기념해야 마땅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 다음 서촌에 살았던 가장 뚜렷한 인물로 겸재 정선을 꼽는다. 겸재는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를 짓고 살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국보 ‘인왕제색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백미이기도 하다. 이 진경산수는 조선인들의 정신적 독립을 보여준 큰 사건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서촌에서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람 중 장혼과 역관 천수경입니다. 장혼은 중인 출신의 학자이며 위항시인으로 정조 임금 때 서적 편찬에 종사했습니다. 옥인동에 ‘이이엄’이라는 당호의 집을 짓고 천수경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중추적 구실을 했습니다. 왕실출판물의 편집과 교정을 맡아 정조 임금한테 적지 않은 신임을 받았지요. 그는 인왕산 기슭 서당에서 천수경과 함께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아희원람(兒戱原覽)이라는 대안 교과서를 만들어 보급하자고 했습니다.”

이어 천수경에 대한 얘기가 이어진다. 역관 천수경은 당대의 시인이자 교육자로 추앙받았다. 인왕산 옥류천 아래에 ‘송석원’이라는 초가집을 마련하고 ‘송석도인’이라 자처하며 동인들을 모아 사를 읊었다. 당시 시인으로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송석원시사’는 유명했다. 겸재 정선, 김홍도와 이인문 등 여러 화가들이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시사모임을 많은 그림으로 남겨 그 품격과 문화생활을 더듬어 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이들의 시사에 초청을 받았던 추사 김정희가 그들의 높은 문학수준에 감동해 송석원 글씨로 써주었는데 천수경이 감사의 뜻으로 그 글씨를 암벽에 새겨 놓은 바위글씨가 현재 남아 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월성위궁은 통의동에 있었습니다. 영조가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을 위해 지어준 집인데 김한신의 증손이 바로 김정희이지요. 정원 한편에 숙종 때 심어진 백송이 1990년 7월 태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서촌 얘기를 하면서 수많은 바위글씨를 현재 남아 있다고 언급한다. 예를 들어 필운대(弼雲臺)로부터 백세청풍(百世淸風)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써놓은 글씨들이 있어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한다.

광화문 문화 살리기 프로젝트 기획 중

그는 이러한 서촌문화를 지키는데 앞장서고 있지만 600년 동안 이어져 오는 광화문 문화를 살리는데 서울시와 함께 기획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서의 고향인 광화문 광장을 만드는 일이다. ‘광화문을 다시 생각하자’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아울러 세검정 일대를 문화예술 특구로 만드는 일에도 관여하고 있다. 옛날 정약용의 흔적도 있고 이 지역에 화랑만 해도 40여개, 문화예술인 50명이 살고 있기에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1943년 서울에서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한국전쟁 3년 전 외교공무원인 아버지가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다대포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한국전쟁 일주일 전 서울에 출장 왔다가 전쟁 중에 변을 당했다. 이후 집안형편은 무척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린 김원은 공부를 워낙 잘했고 글짓기 등 각종 대회에 참가해 상을 죄다 휩쓰는 실력을 발휘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큰 사람이 되어라’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학에 진학했다. 생활력이 강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숙비와 학비를 보탰다.

고1때 김수근이 ‘자랑스러운 선배’의 자격으로 경기고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다. 이때 김수근의 강의 내용 중 “국회란 민의를 수렴해서 결정하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한 위엄이 있어야 존경을 받는다”라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아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미술대학에 진학해 조각가가 되려고 했으나 집안형편이 어려워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던 동료들과는 달리 ‘국내 잔류’를 고집하며 ‘김수근 건축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건축철학’ ‘공간심리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내공을 쌓았다. 그러던 중 1973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고 유럽의 건축을 보며 ‘우리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1978년 한국종합전시장 현상설계에 응모해 1등을 차지하면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80년 이후에는 ‘올해의 작품상’ 등 매년 빛나는 수상작을 내놓아 우리나라 건축문화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늘 행복해지는 건축을 생각합니다. 사는 사람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Queen 김문] 사진 [Queen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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