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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 기상천외했던 추억의 악동 일기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 기상천외했던 추억의 악동 일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8.06.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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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나무에 나를 묶으며 통곡했던 어머니의 그 진한 사랑을 기억합니다"
 
해방 이후 첫 밀리언셀러 기록했던 작가
빽빽하게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김홍신은 막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의 원고에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김홍신. 1980년대 초 한 젊은이의 돈키호테 같은 모험담을 그려낸 ‘인간시장’으로 해방 이후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 밀려드는 주문에 옵셋 인쇄 대신 신문 인쇄 방식을 택해 주문을 맞추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되는 작가. 한때 그는 국회의원이었다. 설화를 빚기도 했지만 그는 모범적인 정치인이었다. 8년 연속 의정 평가 최우수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시 처음의 자리였던 작가로 돌아왔다. 작가로 돌아와서 그는 ‘대발해’라는 대작을 발표했다. 우리 민족사에서 변방에 밀려 있던 발해사를 중심으로 올려 세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성기 못지않은 필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는 점점 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근 인도와 네팔의 불교 10대 성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또 하나가 있는데 뜨겁고 아프고 그러나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6∼7백 매 분량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준비하고 있는 것은 정치에 관한 소설이다. 정치를 그만두고 바로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다 보면 겉절이 같은 작품을 쓰게 될 것 같았다. 오래 묵은 김치처럼 향도 나고 맛도 깊은 작품을 쓰고 싶었다.
“실존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직도 많은 정치인들이 생존하고 있거든요. 선역보다 악역을 그릴 일이 많고 보니 여러 번 주저하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정치를 할 때 대단히 진보적인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이나 운동권의 진보 인사들이 일부이긴 하지만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었어요. 반면 극우 인사인데도 참 인간답게 느껴진 사람도 있었어요. ‘인간시장’을 썼던 것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참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려고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싱싱해지는 김홍신의 유년 시절은 변두리의 삶이었다. 김홍신의 아버지는 평소에는 거의 말씀이 없으시다 약주만 드시면 말씀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정수가 담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수준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삶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 당시의 어머니와는 조금 달랐다. 아들에 대해 전폭적인 사랑을 주는 것은 여느 어머니나 다를 바 없었지만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용서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용서를 빌면 두말을 하지 않는 분명한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 김홍신의 집 안방 문턱 위에는 늘 회초리가 다발로 묶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마냥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포근하고 따뜻한 점이 많았다. 어머니가 그를 그렇게도 사랑하면서 엄격하게 대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김홍신의 아버지는 집안의 둘째였다. 위로 큰아버지는 아들이 없었고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큰아버지가 종손이었기에 종손을 잇기 위해 문중에서는 김홍신을 양자로 보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문중의 권유는 명령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문중의 권유를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을 정면으로 거슬렀던 사람이 어머니였다. ‘내 배 아파서 낳은 사랑하는 자식을 아무리 큰집이라고 해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웬일인지 아버지도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문중의 결정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놓고 문중에 반대하지는 못해도 어머니가 보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죠.”
어머니는 보기 드문 용기를 낸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문중에서 ‘왕따’가 되는 가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을 보다 반듯하게 키우고 싶어 했다.

장애인을 놀리는 자식에게 회초리를 든 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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