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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기 연습에 한창인 방실이의 내면 고백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기 연습에 한창인 방실이의 내면 고백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3.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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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기다리는 무대를 향해…’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기 연습에 한창인
방실이의 내면 고백
 
 
2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분당의 한 병원에 입원해 현재는 재활치료에 여념이 없는 가수 방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까지 갔던 그녀는 이제 휠체어를 밀쳐두고 두 발로 땅을 짚을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호전된 모습이었다. 죽음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해가는 방실이의 내면 고백을 들어보았다.


취재_ 김은희 기자 사진_ 양우영 기자
 
“벽에 걸린 사진 속 내 얼굴을 보며
중얼거려본다, ‘기다려, 방실아’”
 
 

2007년 6월 뇌경색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2년을 향해가고 있다. 내 평생 이 시간처럼 길었던 시간이 있었을까. 아직도 처음 쓰러진 후의 절망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로지 약과 주사에 의지해야만 했던 시간, 창밖을 내다보면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차가 오는 곳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하느님,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도록 나 좀 그냥 데려가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을 정도였다.

요단강 끝에서 뱃머리를 돌리며
그러나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내 손을 잡아준 것은 나를 기다려주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나를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내 모습을 보며 투병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환자들.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생각하니 내가 이렇게 약해질 수는 없었다. 내가 처음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소식을 모르던 우리 부모님은 뉴스를 보고 쓰러져버렸다. 어머니는 실신한 채로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모녀가 나란히 서로 다른 병원에 누워 있는 신세였던 셈이다. 당시 나를 치료한 담당의는 오빠 부부를 불러 “수술이 힘들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랬던 내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끝내고 이렇게 점점 호전되고 있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그런다. 요단강 끝까지 건너갔다가 배를 돌려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이다.
조금씩 호전되고 있던 내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지난해 가을이었다. 아끼던 동생 진실이(최진실)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다. 그 순간의 충격은 ‘이러다 몸 상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났다. 식사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없이 우는 일뿐이었다. 나는 진실이의 버라이어티쇼 첫 데뷔 때, 같은 무대에 섰다. 벌써 22년은 된 이야기일 것이다. 조그마한 애가 오더니 “언니, 제가 처음 나와 아무것도 모르니까 저 좀 알려줘요”라고 말하며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이후로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진실이가 스타가 되기 전부터 봐왔기 때문일까. 진실이는 정말 내게 동생 같은 아이였다. 결혼식을 앞두고 손수 초대의 글을 적은 청첩장을 보내올 만큼 마음씀씀이도 고왔다. 내가 일본에서 활동을 하던 시절, 그곳에 있던 진실이와 만났던 기억도 이렇게 선명한데….
진실이의 죽음 앞에 난 모든 의욕을 놓아버렸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난 이렇게 아파도 살려고 노력하는데,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렇게 세상을 떠났을까. 지금까지 진실이가 어떻게 이뤄놓은 것들인데…. 생각할수록 속상하고 불쌍해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진실이의 죽음 앞에서 1년 치의 눈물은 다 흘린 것 같다. 기진맥진해서 무엇을 먹을 수도 없었고, 운동을 할 수도 없었고, 다리는 마구 떨려왔다. 결국 피를 수혈 받고 20시간 넘게 링거를 맞아야만 했던 그때의 후유증에서 회복하기까지 두 달은 걸렸던 것 같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진실이의 죽음 앞에, 난 지금도 인터넷의 댓글 문화가 사라져버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받은 사랑을 다 갚기 위해서라도 꼭 일어나야지
아프고 난 후,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았던 사람인지를 깨닫게 됐다. ‘정말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줬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기 위해 병문안을 왔다. 특히 가장 미안한 건, 내 병에 좋다는 약 등을 보내준 사람들이다. 병원의 약 이외에는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내준 약들을 모두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날 위해 정성을 보내준 그분들에게 그것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와 죄송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사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면서도 ‘조금 지나면 잊히겠지’, ‘조금 더 지나면 찾아오지 않겠지’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2년이 다 되도록 동료들도, 주변 사람들의 모습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도 꾸준히 찾아오고, 바빠서 못 오게 되면 전화를 걸어올 정도로 잊지 않은 동료들의 사랑을 생각하면 과연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선후배, 동료들에게 이런 과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가수들은 기수가 있는 탤런트나 개그맨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오늘 나와서 내일 뜨면 바로 스타가 되는 것이 가요계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경기도 어려운 시기에 트로트 가수들이 힘을 모아 내게 수천만원의 돈을 모아줬다. 나도 연예생활을 30년 했지만 그동안 이런 일이 있었던 적도 없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나는 평생 짐을 진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빨리 나아서 선후배, 동료와 손잡고 무대 위에 서서 노래하고, 이야기 나누는 날이 왔으면 싶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연예계와 가요계를 위해서 정말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다시 노래하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곁에서 응원해준 동료들과 다시 같은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현철, 김국환…, 가족처럼 내게 힘을 주고 응원을 해주는 동료들의 마음이 지칠 때마다 나를 일으켜세운다.
특히 대관이 오빠(송대관)가 준 감동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오빠는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고 있던 나를 찾아와 내 손을 잡고 “너 지금 뭐하는 거냐, 빨리 일어나서 집에 가자!”라고 소리를 쳤다는 오빠는 지금도 내 생일마다 잊지 않고 생일 케이크를 손에 들고 고깔모자를 쓴 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병실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오빠가 전해주는 생일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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