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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의 ‘옥신각신 사랑법’
동갑내기 국악인 김준호 손심심 부부의 ‘옥신각신 사랑법’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07.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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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손심심 부부는 올해로 결혼 15주년을 맞이했다. 여느 부부 같으면 중년의 권태기를 느낄 만도 할 시기. 그러나 이들 부부에게는 예외인 듯하다. 서로 취향도,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지만 유독 우리 소리와 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이 반짝인다. 서로 한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막으며 경쟁하듯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듣고 보면 결국은 서로에 대한 칭찬이다. 옥신각신하는 말투 속에 곰삭은 애정이 느껴지는 부부의 얼굴은 그래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각자 우리의 소리와 춤에 뜻을 두고 살아온 두 사람이기에 사실 결혼에는 큰 뜻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를 안 순간부터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깨닫게 됐다. 힘겹게 결혼에 골인한 이후 지금까지 부부는 서로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고 있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 행복한 인생
김준호·손심심 부부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12년 전. 당시 MBC에서 방영된 ‘10시 임성훈입니다’의 ‘우리의 소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라는 코너를 통해 등장한 이들 부부는 구성진 소리와 사투리 섞인 구수한 입담으로 큰 화제를 불러왔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으며 기분 내키면 즉석에서 소리 한 소절을 뽑아내는 두 사람을 통해 ‘우리 소리와 춤’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도 바뀌게 됐다. 그러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달라진 것도 많다.
“솔직한 이야기로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웃음). 그래도 예전에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라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옛날보다 더 접근하기 어려워요. 아무래도 댄스음악과 팝을 먼저 접한 세대니까요.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예전 486 컴퓨터부터 시작해서 늘 새로운 것이 나오면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김준호)”
끊임없는 시도와 모색은 이들 부부의 장점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팬들과 온라인 교류를 하는 한편, 단순히 국악만을 고집하지 않고 ‘허공’의 작곡가인 정풍송 선생을 만나 국악과 대중가요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했다.
“우리 것을 더 잘 알리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자존심이에요. 그런 것은 애초에 없어야죠. 대중가요를 하는 분들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묘한 것을 가지고 있어요. 바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죠.(김준호)”
부부의 이런 활동의 바탕에는 어렵게만 여겨지는 우리의 소리를 조금이라도 쉽게 알리기 위한 노력이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노력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변화는 부부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한다.
“우리 소리를 ‘민요’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 말을 안 쓰게 했다는 데 보람을 느끼죠. 민요는 일본 사람이 쓴 ‘조선민요의 연구’에서 비롯된 말이에요. 적어도 요즘 소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민요라는 말 대신 우리 소리라는 말로 많이 바꿔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김준호)”
   
부부이자 친구, 때로는 적군이 되는 아내와 남편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이 쏟아져나오는 요즘에도 이들 부부의 삶은 변함이 없다. 우리 소리를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 그러나 처음부터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에 개의치 않는다. 최근 들어 찾아가는 공연 무대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이 역시도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 부부가 해왔던 일이다. 때론 너무 앞서 나간다는 이유로 오해와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것 역시 지금의 국악인 김준호·손심심 부부를 만들어준 밑거름이 됐다.
“요즘 이동식 무대를 한다고 그러는데, 저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어요. 때로는 장터에서도 판을 벌였죠(웃음). 해설이 있는 공연도 그때부터 했어요. 한번은 어떤 교수가 ‘춤을 보러 왔지 해설을 들으러 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전공인을 보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모르는 한 분을 위해서 공연한다’고 했죠. 살풀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 알게 한 뒤 눈과 귀를 통해 즐기게 하고 싶었어요.(손심심)”
방송을 통해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은 뒤에도 그런 활동은 이어졌다. 바다 멀리 낙도는 물론 산간 오지 장터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서슴없이 나섰다. 때론 어렵고 고달프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떤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는 오기가 생겼다.
“바닷가 거친 바위도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수백 년이 흐른 뒤에 예술작품으로 거듭나잖아요. 우리도 어쩌면 당시에 그렇게 욕하던 분들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이제까지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희를 봐주는 거죠.(손심심)”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르는 것처럼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늘 함께하는 이들이기에 부부라는 사실 외에도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동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적군’이라고. 남편은 소리, 아내는 춤으로 각자 자신의 분야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무대에 서면 부부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둘이 싸워요. 워낙 욕심이 많아서…(웃음). 욕심이 없이는 발전도 없는 거죠. 무대에서 서로 눈총을 보내고 그러면 또 정신이 번쩍 들어 더 잘하려고 하죠.(손심심)”

운명적인 만남으로 이룬 사랑
부부가 처음 만난 것은 극단 예사당을 통해서였다. 당시에도 두 사람은 각자 소리와 춤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중매쟁이 노릇을 한 것 역시 소리였다. 공연을 위해 남편에게 소리를 배우면서 아내는 ‘이 사람은 좀 더 갈고 닦으면 보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남자로서가 아니라 함께하면 좋을 동료로 보게 됐어요. 그러다 남편이 산으로 가 스님이 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안 한다는 것을 설득해서 같이 일하기 시작했어요.(손심심)”
우리 문화를 살리는 데 한 획을 그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함께한 두 사람. 당시 김준호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손심심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곧 남편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그이의 예상은 현실로 나타났다.
“남편을 데리고 다니면서 알리기 시작했어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결국 부산 교원연수원에서 기회가 왔죠. 강의를 하기로 한 사람이 못 나가게 됐다고 해서 남편을 대타로 넣은 거예요. 결과는 성공이었죠.(손심심)”
“그 강의 두 시간으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아내가 은인이죠.(김준호)”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결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신뢰를 넘어서 사랑으로 발전해 있었다. 먼저 용기를 낸 쪽은 아내였다.
“저는 그때 이미 집안에서 정해놓은 약혼자가 있었어요. 남편에게 술을 먹이고는 집으로 데리고 갔죠. 그러고는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기절할 뻔하셨죠(웃음). 하지만 제 결정을 존중해주셨어요.(손심심)”
30대 중반에 결혼을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부부에게는 아이가 없다. 공부와 우리 것을 알리는 데에 의기투합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이를 가질 겨를이 없었다고. 그러나 이제까지 한결같은 사랑은 변함이 없다.
“둘 다 욕심이 많아서 아이를 안 가졌던 것 같아요. 사실 처음부터 아이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저희에게 아이는 우리 문화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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