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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 온 가족 인터뷰
한국을 빛낸 메이저리거 추신수 선수 온 가족 인터뷰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09.12.1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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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거로서 거듭나기까지 밑바탕이 되어준 헌신적인 아내와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추신수의 성공은 빅리거 1호로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활약하고 있는 박찬호 선수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피나는 노력이 존재했다. 빅리거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떠난 9년 전,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던 한국 고교 야구 유망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눈물 젖은 빵을 삼키며 무명의 설움을 견뎌야 했다. 6년여의 오랜 마이너리그 선수 생활, 더구나 그는 시애틀에 입단하면서 구단의 요구로 투수에서 타자로 포지션까지 전향해야 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구단 메이저리그 팀의 일본 출신 선수 이치로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마이너리그 선수였지만 매년 올해의 유망주로 선정됐고, 마이너리그 올스타전에도 출전해 두각을 나타냈다. 결국 지난 2006년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이적하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무대에 본격적인 진출을 알린 것.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운이 이어졌다. 바로 팔꿈치 부상의 덫이었다. 미국으로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절망’을 떠올린 순간이었지만 그는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눈물겨운 재활훈련을 통해 올해 클리블랜드 4번 타자로서 생애 최고의 성공을 거둔 추신수. ‘추추트레인’은 그런 그를 사랑하는 미국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힘이 넘치는 그의 모습이 미국 팬들에게 마치 달리는 기관차를 연상시켰기 때문. 증기기관의 소리를 나타내는 미국의 의성어 ‘추추’는 그의 성과도 맞아떨어져 팬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이렇듯 많은 미국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메이저리거가 되기까지 절대적인 힘이 되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 아들을 위해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 먹인 부모


지난 11월 3일, 인천국제공항은 추신수의 귀국을 앞두고 많은 취재진으로 북적였다. 그 사이에서 뚫어지게 입국 게이트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추신수의 부모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1년에 한 차례, 매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은 시간임에도 부부를 설레게 하는 듯했다. 그런 부부의 곁에는 최근 배우로 활약하고 있는 둘째 아들 추민기가 함께했다. 오랜 꿈을 이루고 금의환향하는 큰아들과 배우의 길을 가고 있는 둘째 아들이 있기에 이젠 걱정 없겠다는 말에 “꼭 그런 것은 아니다”며 웃는 부부의 얼굴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아들이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전화 통화를 합니다. 전 지난 3월에 한 번 미국에 가서 만나긴 했지만, 걱정이 여전하네요. 잘하면 잘하는 대로 유지가 될까 걱정이고, 못하면 또 못해서 걱정이죠.”(아버지 추소민 씨)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항상 걱정이 앞서요. 부상 걱정도 있지만, 오늘 잘했으면 ‘내일이 있으니까 내일 또 잘해야 할 텐데’ 하면서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항상 걱정이죠. 걱정이 얼마나 많은데… 남들은 이제 걱정 없다고 하지만 보기와는 달라요(웃음).”(어머니 박유정 씨)  
그런 부모를 바라보며 둘째 아들 추민기는 내심 심술이 나는 듯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형이 더 좋나, 내가 더 좋나”라고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는 의뭉스레 “임마, 나는 니가 더 좋지. 신수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잖아”라고 대꾸한다. 얼마 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형에 대한 남다른 우애를 드러내기도 한 추민기인지라 그런 부자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미소가 지어질 따름이다.
마침내 입국 게이트가 열리고 추신수가 아내와 함께 첫째 아들 무빈이의 손을 잡고 둘째 아들 건우를 유모차에 태운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 식구를 향해 “신수야”라며 소리친 아버지 추소민 씨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안긴 것은 첫째 손자 무빈이었다. 손자를 한 팔에 안고 아들과 감격의 포옹을 한 아버지, 3대가 어우러진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해 보였다. 이어 입을 연 추신수의 첫마디는 그간 끊임없는 응원을 보내준 고국의 팬들에 대한 감사였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값진 한 해였어요. 한국을 찾고 부모님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설레죠. 제 아들에게도 이곳은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이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조국이라 앞으로 자주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다들 경제적으로 힘드셨던 것으로 아는데 스포츠가 많은 힘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어요. 감사합니다.”
손자를 품에 안고 대견한 듯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가족. 언제나 두 아들이 최우선이었던 아버지의 사랑법은 때론 남들이 보기에 다소 과격한 면도 없지 않았다. 채 날이 밝기도 전에 공동묘지를 데리고 가거나, 힘을 단련시키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뛰게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또 키를 키우기 위해 철봉을 잡게 한 채로 발에 역기를 매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비과학적인 방법이었다”며 웃는 아버지이지만, 그런 것조차도 추신수의 오늘을 있게 한 초석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처음 시작한 후 아버지의 뒷바라지 일화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어를 밥 먹이듯 한 것은 물론 뱀을 비롯해 녹용과 개소주까지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다 먹였다. 어린 나이에 비위에 거슬릴 법도 했지만, 추신수 역시 그런 아버지의 정성을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 야구를 더 잘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이 야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중학교에 이어 고교 야구에서도 스타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아버지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저는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습니다. 손자도 태어났지만 아직까지는 아들이 더 소중합니다. 손자가 1백 명이 아니라 2백 명이라도 저는 아직 아들이 우선이에요. 신발이고 속옷이고 항상 깨끗이 닦고 다려서 입혔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열성은 고인이 된 추신수의 스승 조성옥 감독이 “신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면 평양에 가서라도 가져올 분”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성공이 보장된 국내 프로야구 진출 대신 미국행을 택했을 때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도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봤을 때는 가슴을 치며 한국으로 돌아가길 권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마이너리그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며 땡볕에서 밥 대신 햄버거를 먹고 있는 아들을 본 순간이었다. 그런 아들의 눈물겨운 모습을 보며 어머니 역시 넌지시 “한국으로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을 정도다. 부부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하지만 가슴 아파하는 부모를 보면서 추신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대신 반드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한 절치부심의 시간은 결국 올해 값진 결과로 돌아왔다. 메이저리그 풀타임 선수로 활약한 첫해 3할대의 타율에 20홈런과 20도루라는 성과를 올린 추신수. 이는 올 시즌 아메리카 리그 유일인 동시에 소속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역사상 68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   
“스무 번째 홈런을 친 날 전화 통화를 했는데, 신수가 ‘아버지 해냈어요’라면서 좋아하더라고요. 이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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