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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사업실패로 이혼, 자살 시도까지 대학교수로 제2의 삶 살고 있는 ‘유도영웅’ 김재엽
잇단 사업실패로 이혼, 자살 시도까지 대학교수로 제2의 삶 살고 있는 ‘유도영웅’ 김재엽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2.0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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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나를 ‘영웅’이라고 불렀지만, 유도복을 벗은 내가 설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유독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테면 첫 사랑과 헤어지던 날 들었던 노래를 불렀던 가수라든지, 고입연합고사를 본 날 극장에서 처음 봤던 ‘19금 영화’의 주인공이라든지. 김재엽은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서는 아직도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듯하다. 1988년 9월 23일. 추석을 맞아 집집마다 명절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소한 기름 냄새가 온 동네에 퍼졌던 날, 그는 국민들에게 추석선물로 금메달을 안겨줬다.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오르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는 대한민국의 아들이요, 영웅이었다.

# 모든 메이저 대회를 석권했던 한국 유도의 간판
“현역에서 은퇴하고 유도계에서 10년 간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6년 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유도가 전공이지만, 학생들에게 특별한 과목을 가르치는 것도 재밌고 즐거워요.”
그를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 시에 위치한 동서울대학이었다. 22년의 세월을 건너 만난 그는 하얀 유도복 대신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경호안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도계를 떠난 것이 벌써 12년이 됐다고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는 여전히 ‘유도영웅 김재엽’이다.
“처음 유도를 시작할 때는 국가대표선수가 되서 유도선수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으로 시작했죠. 그런데 대표선수가 되고부터 욕심이 생겼어요. 힘든 훈련과 체중조절의 고통을 보상받는 것이 메달 따는 것 밖에 없었거든요.”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됐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그의 현역시절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등 모든 국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그였다. 특히 1984년 LA올림픽에서 일본선수에게 석패해 은메달에 머무른 뒤 심기일전해 4년 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 그는 지금의 김연아와 박태환이 부럽지 않을 명성을 얻게 됐다. 올림픽 결승전은 그의 은퇴경기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결승전을 이기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금메달을 땄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이제는 이렇게 큰 무대에 설 수 없겠구나’라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경기에서 이기는 순간 그 동안 고생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은퇴한지 2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 희망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간들,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그는 한 실업팀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 1989년에는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코치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 후 실업팀 감독에 오르며 현역시절에 이어 지도자로서도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의 생활은 현역시절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유도계에 만연해 있던 파벌분쟁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편파 판정으로 유도장에서 많은 시위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협회와 갈등을 빚게 됐죠. 그러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도자 입장에서 제가 데리고 있던 선수가 불이익을 당하는데, 어떤 지도자들이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협회에서 ‘유도장의 난동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됐죠. 좋게 말하면 제가 나온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쫓겨난 거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도계 어디에도 발을 못 붙이게 됐어요.”
그는 그렇게 유도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유도가 아닌 다른 삶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던 그는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에 맨몸으로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가 부딪힌 세상은 가혹할 만큼 냉정했다.      
“유도계를 나와서 캐피탈 메니지먼트, 전자상거래, 광고업, 외식업 등 몇몇 사업을 했어요. 그러나 모두 실패했고, 사기도 당하면서 벌어났던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빚만 떠안게 됐어요.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됐죠.”
재산이며 명예 그리고 가정까지, 모든 것들이 몇 년 사이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올림픽의 영웅’은 하루아침에 많은 빚을 떠안고 두 아이와 어머니를 데리고 쪽방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다. 그는 괴롭던 지난 일들이 생각났는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한숨 섞인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술을 마시고 차를 내달려 천호대교까지 가서 핸들을 한강 쪽으로 꺾었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차가 떨어지지는 않았어요. 차는 뒤집어졌고 전 정신을 잃었어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그때의 상처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일로 몇 번의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만약 제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또 다시 시도했을 거예요. 그 일이 있은 후 1년 반 정도를 방황을 했어요.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거죠. 그때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원망스러웠어요. 살기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했는데, 그 꼬리표가 길을 막더라고요. 하다못해 포장마차를 하나 하려고 해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포장마차를 한다고 손가락질을 해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어요.” 

# 삶에 의지를 불어넣어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그러나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돌파구로 삼은 것은 ‘공부’였다. 평소 주변 운동선배들이 학교 교단에 서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독한 마음을 먹고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지만,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만 했기 때문에 학업적인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 공부를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사람만 매쳐왔던 제가 책을 매치려니 정말 힘들더군요. 유도보다 공부가 훨씬 어렵더라고요. 외국어도 한문도, 논문 쓰는 방법들도 너무 힘들었어요. 4년 동안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그는 4년 전 경기대학교 경호안전학과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올해 비로소 박사 과정을 받는다고 했다. 논문심사도 끝난 상태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금메달을 딴 것 만큼 기쁘다”며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삶까지 포기하려 했던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덕분이었다. 아이들은 그에게 살아야할 이유를 줬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자라서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었어요. 제게 격려도 많이 해주고, 보고만 있어도 든든해요. 아이들 모두 자기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어요. 참 기특하죠.”
올해 대학교 2학년이 된 딸은 연기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아직은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몇몇 작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꾸준히 노력중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운동선수가 됐다. 인천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들은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유망주로 꼽힌다.
“피는 못 속이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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