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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아내를 추억하다 에베레스트 부자 등정 성공한 탐험가 허영호?아들 재석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아내를 추억하다 에베레스트 부자 등정 성공한 탐험가 허영호?아들 재석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0.09.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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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하기 전까지 탐험가로서의 아버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함께 정상에 오르고 나니 이제는 아버지를 넘어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됐어요”


히말라야 14좌 등정, 인류 최초로 세계 3극점(남·북극점, 에베레스트)과 7대륙 최고봉 완전 정복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탐험가 허영호 대장이 아들 재석 씨와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마다 느낌이 다르다”고 말하는 허 대장은 산세가 아늑해 자주 이곳을 찾는다. 평소 아버지와 함께 탐험하기를 좋아하는 아들은 이번에도 같이했다.
“탐험하러 가자”. 산을 오르며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가.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여행이자 탐험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던 부자는 이윽고 정상에 다다랐다.

아버지마저 잃을 수 없기에 함께했다
허영호 대장과 재석 씨는 올해 초 에베레스트 원정에 성공했다. 두 사람의 등정에는 단순히 부자가 같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원정 등반에 많은 시간을 보내셨어요. 덕분에 저는 놀이공원 한번 가본 적이 없었죠.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정에 나설 때면 미끄러져 추락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미역국조차 잘 끊여주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1년에 반 이상을 나가 있다 보니 생활은 어머니 중심으로 돌아갔죠. 어머니는 집안의 가장이자 저에겐 가장 좋은 친구였어요.”
아들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늘 강한 사람이었다. “네 아빠는 내가 키웠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어머니가 그에게는 아버지보다 더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의자에 묶어놓고 싶었어요. ‘남들 다 누리는 소박한 행복을 왜 나만 누릴 수 없냐’는 식으로 떼쓰기도 했죠. 아버지는 저에게 미안했는지 종종 해외 등반에 가족을 데려갔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간 곳이 제가 여섯 살 때 떠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였죠.”
당시 그의 어머니는 임신 5개월이었다. 임신 중 여행, 그것도 에베레스트라니 의사는 완강하게 만류했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결국 허 대장이 로체에 오르는 한 달 반 동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생활했다. 그후로도 가족 등반은 계속 이어졌다.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이란 북부에 있는 산맥인 엘부르즈,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몽블랑까지….
“몽블랑을 등반할 때도 좋았지만 사실 그후로는 다시는 산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산과 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상에서 느끼는 환희에 비해 과정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2009년 여름 허 대장은 가족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내년에 에베레스트에 간다”는 거였다. 당시 어머니가 파킨슨 유사병으로 투병하는 상황에서 아들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는 근육이 점점 말라가 누워만 있었고,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5년간 간호했지만, 결국 지난 1월 눈을 감았다.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도 부자는 담담한 듯 이야기했다. 이유를 물으니 “후회 없이 사랑했다”고 말한다.
“어머니한테 애정표현을 많이 했어요. 뽀뽀도 많이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표현은 다 한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잘 못해준 것 때문에 후회가 남아 더 슬퍼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무척 즐겁고 재미있게 살다 가신 것 같아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조용히 먼 산만 바라볼 뿐이다. 아내가 보고 싶지 않느냐는 물음에 “사람이야 태어나면 죽고 하는 건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담담한 듯 말하지만 속으로는 많이 울었으리라.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았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죠. 어머니가 고백해서 결혼까지 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투병하실 때도 몸이 아프니까 주무실 때가 많았는데, 아버지가 들어오는 문소리만 들려도 눈을 번쩍 뜨셨어요. 아버지도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 옆에 누워서 TV도 보고 말도 건넸어요.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과 다름없이 많이 사랑하셨어요.”
가족에게 가장과도 같았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자 아들은 에베레스트에 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베테랑이지만 나이가 많은 아버지를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눈이 참 많이 내리던 날이었어요. 장례를 치르며 다짐했죠. 아버지마저 잃을 수 없다고. 장례 마치고 아버지한테 같이 에베레스트에 가겠다고 말했어요. 집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보다 같이 있으면 마음을 덜 졸일 것 같았거든요.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다른 대원들과 의논해보겠다고 하셨죠. 그렇게 원정대에 참여하게 됐어요.”

어머니의 힘으로 정상에 오르다
“베이스캠프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어요. 그런데 막상 등반을 시작하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더라고요. 힘든 게 상상 이상이었어요. 공포감도 컸고요. 에베레스트는 크레바스(빙하에 생긴 깊은 균열)가 많아 주의해야 해요. 한날은 크레바스를 건너기 위해 점프를 하려는데 순간 몸이 밑으로 확 빠졌어요. 크레바스가 약해져 제 체중을 견디지 못한 거죠. 추락 순간 줄을 잡아서 1.5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올라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온몸에 멍이 들었어요.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나요.”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또 한 번 찾아왔다. 힘든 사투 끝에 정상이라고 생각한 고지까지 왔는데 진짜 정상이 아니었던 것. 에베레스트 등정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이었다.
“눈앞에 진짜 고지가 보였어요. 날카로운 칼날 능선과 낭떠러지가 보였죠. 아버지는 웃으시며 ‘엄청나지? 저기가 힐러리 스텝이야’라고 하셨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발 디딜 틈이 별로 없었어요. 로프 하나에 몸을 의지해서 가니까 공포감이 극심했어요. 왼쪽으로는 2천 미터 절벽이었고, 오른쪽으로는 2천5백 미터 빙벽이 보였어요. 한번 실수가 추락사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했죠. 거의 기다시피 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어요. 그렇게 에베레스트 등반 한 달 만에 정상에 올랐어요.”
정상에 올라서자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들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한 장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20년 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어머니를 기념할 만한 게 별로 없잖아요. 유품이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어렸을 때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가져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어머니 사진을 들고 아버지를 꼭 껴안은 채 한참을 울었어요. 사진 보면서 ‘엄마 잘 있어? 20년 전에 아빠랑 여기 왔던 거 기억나?’라며 말을 걸기도 했죠. 아버지한테도 ‘이렇게 힘든 곳에 죽을 고생을 하면서 네 번이나 올라오셨냐’며 소리치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보며 “잘했다, 잘 참았어”라며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아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자신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원정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아들은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전까지는 탐험가로서 아버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같이 원정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힘든 건지도 몰랐고요. 어릴 때는 부모님 직업을 자주 조사하잖아요. 그때마다 산악인인 아버지가 부끄러워 회사원이라고 적었어요. 이제는 아버지를 넘어 사람으로서 존경하게 됐어요. 아버지는 일반인하고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전문산악인들도 죽고 힘들어하는데 아버지는 힘든 게 좀 덜하시더라고요. 고소 적응 능력도 일반인들과 다르고 노하우도 있고요. 대원들을 책임져야 하니까 준비 자체를 꼼꼼히 하세요. 그런 모습 보면서 ‘확실히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죠.”

부자의 세계 도전은 계속된다
“자연의 순리대로 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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