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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성일, 마지막 가는 길
배우 신성일, 마지막 가는 길
  • 송혜란 기자
  • 승인 2019.01.20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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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 지다
유족인 부인 엄앵란이 슬픔을 억누르고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하고 있다.

한국 영화 최고의 스타로 꼽히는 고 강신성일. 그가 항년 81살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불과 한 달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신사다운 모습으로 참석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많은 이들이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한국 미남의 대명사도 무서운 병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지난해 6월부터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혹독한 투병 생활을 해온 그는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야 말았다.(Queen 12월호)

“신성일 별세, 마음 아프고 안타깝다. 범접할 수 없던 진짜 스타.”(배우 안성기)
“오늘 이 상을 신성일에게 바치고 싶습니다.”(배우 윤정희)
“정말 꾸밈없이 좋았던 분, 은혜 잊지 못한다. 부디 고이 잠드시길.”(정치인 이회창)


지난해 11월 4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그의 장례식장엔 “인생은 연기. 연기로 왔다가 연기로 떠나는 것”이라며 쓸쓸해 하는 부인 엄앵란의 입관식을 뒤로 정재계부터 연예계 인사까지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오전부터 희극인 송해, 배우 이덕화, 전원주, 가수 김흥국 등은 물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심재철, 정진석, 김병준 자유한국당 의원,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찾아 고인의 영정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랫동안 팬으로서 그를 사랑했던 50~60대 일반 여성들도 엄숙한 장례식장에 들러 헌화로 조용히 조문 후 돌아갔다.

범접할 수 없던 진짜 스타

1937년 5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난 강신성일은 도청 공무원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막내아들인 그에게 애정이 깊었던 어머니 덕에 그는 꽤 모범적으로 자랐다. 타고난 미남에 자존심은 굉장히 셌으며, 감수성도 사뭇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학업성적도 좋아 명문대 법대나 의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큰 사기를 당한 어머니로 인해 집안이 기울자 대학은커녕 판잣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든 성공해보겠다는 그의 결의는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어릴 때부터 잘생겼다는 말을 주야장천 들어온 탓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배우가 떠올랐던 것이다.

1959년 우여곡절 끝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강신성일. 고등학생 역할을 통해 스타로서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보인 그는 차츰 청춘 영화 스타로 나아갔다. 이어 멜로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해 신인상과 인기상을 모두 독차지하는 행운까지 누린 그는 김기덕 감독의 <정교사>,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 등을 통해 배우로서 자신만의 진가를 발휘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은 지금도 그의 대표적으로 남아있다. 길거리의 삶을 사는 폭력배의 불같은 사랑을 참 멋지게도 표현한 강신성일. 당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엄앵란과 수차례 작품으로 재만남을 이어가다 부부의 인연까지 맺은 그다.

그 뒤에도 계속 <춘몽>, <안개>, <까치소리>, <일월>, <만추>, <휴일>, <별들의 고향>, <장남>, <레테의 연가> 등을 통해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져간 그는 청춘에서 중년으로 점차 변모해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유작이 된 <야관문: 욕망의 꽃>에서 불안하기 그지없던 청춘 때와 달리 노련하고 중후한 연기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대스타임을 증명해 냈다. 한국영화의 큰 흐름에 그의 인생사가 모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계 생활, 굴곡 많아

연기 인생 중간에는 잠시 정치에도 깊이 발을 디뎠던 강신성일. 강신영이라는 본명을 배우 신성일로 사용하던 그는 1981년 강신성일로 개명, 한국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방을 거듭했다. 2000년 삼수 끝에 급기야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195건 법안을 발의하며 정치인으로서도 남다른 의욕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옥외광고물 선정 비리 혐의로 2005년 징역 5년 추징금 1억8,700만원을 선고받아 2년간 복역하며 정치인으로서 큰 오점을 남긴 강신성일. 당시 그는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 사면 조치로 석방된 그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 정계를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이회창, 유승민 등 정계 인사들과 인연은 이때 맺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로서는 완벽한 그였지만 여자관계 등 사생활, 정치 인생에서 굴곡이 많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때는 늦었지만 다시 산다면 선녀같이 남편을 공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평소 자존심 강하고 자기관리도 철저,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던 그도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작별 인사를 전했다. 떠나는 길목에서 많은 이들의 추모를 받은 강신성일. 특히 지난해 11월 6일 진행된 그의 발인에 앞서 힘겹게 지팡이를 짚고 등장한 부인 엄앵란이 남긴 말에 영결식장은 눈물로 물들었다.

“이 아침에 이렇게 많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진을 보니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을 떠나보내며 울고 싶진 않습니다. 누군 날 더러 왜 안 우냐고 하더군요. 울면 망자가 걸음을 못 걷는다고 해요. 이 세상을 떠나는 마음이 아파서요. 그래서 억지로 안 울고 있습니다. 이따 밤에 이부자리 덮고 실컷 울려고 해요. 그동안 그와 살며 희로애락도 많았지만 엉망진창이었어요. 때는 늦었지만 다시 산다면 선녀같이 남편을 공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어 그는 엄앵란, 딸과 사위, 손자들 등 유가족을 비롯해 후배 연기자 독고영재, 안성기, 이덕화 등의 배웅을 받으며 경북 영천의 자택으로 향했다. 이어 11월 7일 그가 잠들 곳에서 추도식이 잇달아 개최됐다. 애써 눈물을 참았던 엄앵란도 이날 만큼은 울음을 참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통곡을 뒤로한 그는 자택 앞마당에 묻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편 평생 국내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강신성일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9일 열린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대리수상은 엄앵란이 맡았다.

“본인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죽을 때까지 본인은 영화인이라고 했거든요. 돌아가실 때도 손으로 허우적거리면서 ‘프레임을 맞춘다’고 그랬는데, 그러다 돌아가셨어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11월 13일엔 살아생전 그의 모습을 담은 MBC <휴먼다큐사람이 좋다>가 방영되어, 끝까지 영화인으로 당당했던 그가 긴 여운을 남겼다는 평을 받았다.

[Queen 송혜란 기자] 사진 양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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