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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의 도발 과연 어디까지인가 안보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그 대책은?
北의 도발 과연 어디까지인가 안보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그 대책은?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1.11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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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천안함, 연평도 포격 사전 예측했다’
전 정보부대장 출신 한철용 예비역 장군

PART 2
北 도발에 대응한다
대한민국 국군의 첨단 무기 대공개

PART 3
‘북한의 추가 도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남성욱 소장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6월 13일과 27일 우리 군의 대북 감청부대인 제5679정보부대는 북한 8전대사령부와 북한 경비정 간에 교신한 도발정보 SI(통신감청정보)를 감청하고 국방정보본부에 북한의 도발이 임박한 징후를 보고했다. 그 내용에는 ‘발포’를 의미하는 도발 용어가 무려 5회나 언급되었고 공격무기까지 거론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예하부대에 내려보내는 블랙북에 이러한 결정적 도발징후 SI를 삭제했다. 그 결과 한국과 터키가 월드컵 준결승을 치렀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서해상에 출몰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공격이 감행되었고 우리 측은 해군 고속정 참수리호가 침몰되고 여섯 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는 바로 ‘제2연평해전’으로 일컬어지는 서해교전의 전말이다.
당시 북한의 도발징후를 포착하고 보고한 정보부대장이었던 한철용 예비역 장군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직면하며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지난 2009년 집필을 끝내고 2010년 4월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진실은 하나’·팔복원)을 통해 미리 경고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천안함 폭침 사건과 주체가 명확한 연평도 포격은 모두 비슷한 도발징후를 보였던 것.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점을 선으로, 선을 그림으로 짜맞춰 그 안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한 장군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제2연평해전 후 정치적 희생양 돼
“이번 연평도 포격은 천안함 폭침 당시보다 더 뚜렷한 정보가 여섯 가지나 있었는데… 간과한 겁니다. 제2연평해전을 끝으로 이런 비극은 더 없어야 했는데 결국 재현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도발할 것이라는 정보가 묵살됐다지만, 이번에는 그야말로 설마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무심코 있다가 당했다고 봅니다.”
한 장군은 제2연평해전 이후 전역을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정부의 눈치를 보던 군의 이해관계 속에 정치적 희생양이 돼 강제로 이뤄진 전역이었다고 한다. 과거 국회 국방위 국감장에서 그는 자신이 보고한 감청정보가 묵살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진실을 말했다. 이미 예견했음에도 안타까운 장병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울분과 군인으로서 국가 안보의 허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섰던 자리였다.
“국가 안보를 위해 증언한 것인데 강제 전역을 당해서 가슴이 아팠죠. 그러나 증언한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안위보다는 국가 안보가 더 중요하니까요.”
한 장군은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김정일 편같이 보였다”며 회한을 쏟아냈다. 당시 화해 무드로 무르익었던 남북관계 속에 북한에 대해서는 미국보다 더 가까운 동포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한 장군은 “심지어 미국에도 우리가 수집한 군사 첩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북한이 변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이 변했고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월드컵이기도 했고 국민을 불안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수집한 정보를 묵살한 거죠. 제2연평해전은 미리 계획된 도발이 분명한데도 나중에는 우발적인 충돌로 발표하더군요. 저는 그동안 정보를 취합해보고 상급부대까지 개입돼 있는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햇볕정책은 적어도 튼튼한 안보를 전제로 이뤄져야 했어요. 그러나 말만 그러했을 뿐 주적 개념도 사라지고 안보는 안보대로 흔들렸던 거죠.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한한 의구심을 가지고 주시해야 할 대상입니다.”       

연평도 도발 예상된 여섯 가지 징후
전 정보부대장으로서 그가 지적한 천안함 폭침 당시 가장 확실한 도발 정보는 감시망 속에 있던 북한 잠수정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이는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설명하기도 한 내용. 그러나 연평도 도발은 무려 여섯 가지의 도발 징후를 보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알려진 내용이지만 첫째가 국정원에 의한 서해 5도 공격계획 사전감청, 둘째가 우리 군의 훈련에 대한 북한군의 보복을 예고하는 공지, 셋째가 북측 해안포 포문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4군단 예하의 방사포가 내륙에서 해안으로 전개된 것이죠. 또 김정일이 백령도 맞은편인 황해도 해안지역 군부대를 시찰했다는 것도 징후예요. 천안함 때도 마찬가지고, 김정일이 군부대를 방문하고 나서는 항상 도발이 있었죠. 가장 결정적인 징후는 포격 예고 후 수 시간 전에 평양 북창비행장에서 북한 최신예 전투기인 미그23 다섯 대가 남하해 초계비행을 하고 황주비행장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미그23 다섯 대의 남하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다. 평양 북창비행장에는 북한 최신예 전투기로 알려진 미그23과 미그29 70여 대가 있는데, 이는 평양 영공을 방어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는 것.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 스텔스기의 평양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배치된 전투기이기에 “전쟁이 일어나도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는 또한 자신의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했다.
“제2연평해전 당시에도 미그29 두 대가 황해도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투기로 대응하는 것을 대비한 것이죠. 천안함 때도 그 한밤중에 북창비행장에서 미그기 두 대가 떠서 초계비행을 하고 황해도 전방기지에 대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두 사례를 봤을 때 미그기가 떴다는 것은 가장 정확한 도발 임박 정보죠. 그것을 놓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노병의 직언, 대응능력은 확실하다
“퍼즐을 맞출 때 조각조각 붙이다 보면 그림이 나오는데 반만 붙이면 무슨 그림인지 확실치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정보도 이리저리 맞춰보며 뭔가를 읽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분석하고 평가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간과한 거죠. 정보는 수집됐지만 위에서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보면 정신과 안보의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죠.”
한 장군은 이를 일각에서 문제 제기한 군의 행정조직화로 인한 야전전투 감각 부재로 꼽았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강한 군대를 추구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사고 없이 제대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군대가 돼버렸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이번 연평도 포격 후 해병대원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대응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포격을 맞아 불타는 순간에도 K-9 자주포 헤치를 열고 들어가 대응포격을 한 것은 정말 용감했어요. 보통 그렇게 포격을 받으면 공황상태에 빠지기 마련인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 해병대 병사는 최선을 다해 대응포격을 했잖습니까. 훈련이 잘됐다는 거죠. 비록 북에 큰 피해는 안 된다 할지라도 그런 대응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어요. 제2연평해전 때도 병사들은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까지 잘 싸웠습니다. 전우를 구하려 했고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도 대응하려 노력했으니까요. 지금의 패턴으로 봐서 북한의 추가 도발은 또 있을 겁니다. 고위급들이 빨리 안일한 안보의식을 버리고 재무장해야 합니다. 병사는 문제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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