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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이 만난 사람, 작가 윤후명
이재만이 만난 사람, 작가 윤후명
  • 매거진플러스
  • 승인 2011.02.14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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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문학의 본질을 되새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TV 프로그램 ‘드라마 법정’과 ‘여성공감’에서 많은 이들에게 편안한 법 해설가로 이름을 알린 이재만 변호사. 여러 명사들의 소송을 진행하는 그이지만 특히 청소년과 여성, 사회 소외계층을 향한 애틋함이 깊다. 그가 이달부터는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화두와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곳에서 자신의 것을 나누며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대한민국 문학계 대가이자 젊은 문인들의 롤 모델이기도 한 윤후명 작가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로 등단한 선생은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면서 이후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구축해나갔다. 특히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적인 감성을 담아낸 소설로 주목받은 선생은 이문열, 이외수 등과 함께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기도 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도시 돈황을 무대로 쓴 소설 ‘돈황의 사랑’은 2005, 2006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한국의 책 100’으로 선정됐으며 다른 저서 ‘원숭이는 없다’, ‘사막의 여자’와 함께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도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된 바 있다.
2007년 제10회 김동리 문학상을 수상한 선생은 현재 창작에 전념하면서 문학비단길 고문과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나누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설가 등단을 꿈꾸며 외로운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이들을 모아 ‘한국소설학당’을 열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것. 올해로 23년째 재능 기부를 이어오는 선생은 지금 우리 문학계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시와 소설은 결국 하나의 작품
이재만 젊은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했어요. 어릴 적부터 재능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윤후명 군 법무관인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떠돌다가 서울에 정착했는데 친한 친구가 많지 않았아요. 글 쓰는 것이 유일한 친구였죠. 중학교 3학년 때 일기를 쓴다는 게 행을 이렇게 저렇게 나눠보면서 쓰던 것이 기억나요. 그것이 시가 아닌데도 재미가 들려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죠.
이재만 왠지 시에 빠져 지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윤후명 맞아요. 대학교에 진학하고서도 아이들과 노는 것보다 시 쓰는 게 더 좋았어요. 시를 쓸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빠진 적도 꽤 있었죠. 그러다 대학 2학년 겨울에 신춘문예에 당선됐어요. 매우 이른 나이에 등단한 거였죠. 기성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준비도 없을 나이였는데 말이죠.
이재만 당시 1년 동안 쓴 시는 떨어지고 며칠 만에 쓴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된 것이라고 들었어요.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의아했을 것 같아요.
윤후명 열 달 넘게 걸려 열심히 쓴 작품이 있었어요. 스스로는 불후의 명작이라며 자신감에 차 있었죠. 시를 쓰고 난 뒤 또 다른 신문의 모집공고를 보고 일주일 만에 다른 시를 써서 냈는데 결국 후자가 당선됐어요. 완벽을 기해서 썼다고 자부했던 것보다 오히려 풋풋한 청춘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심사위원들 눈에 띄었던 모양이에요.
이재만 그렇게 시를 좋아했는데 이후에는 소설을 썼어요. 장르가 다른 두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윤후명 시집을 계속 내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어요. 시만이 오직 순수의 대명사라고 생각했는데 시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쳐냈던 잔해들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고 할까요. 사실 소설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모든 것을 다 아우를 수 있는 것은 소설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재만 시 같은 느낌의 소설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개성적인 작가라는 평도 받고 있는데, 이러한 평은 지금 시대에 더욱 빛나는 것 같아요.
윤후명 잘 쓴다는 전제하에 소설가는 달라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예술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각자의 다름은 본인의 내면에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소설가의 길을 걸으면서 먼저는 시의 정서를 가져와야겠다는 것과 주인공을 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이재만 지금이야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어땠나요. 매우 이색적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윤후명 그때는 3인칭 시점에 객관적인 느낌의 소설이 주를 이루던 시기였어요. 당연히 나를 주인공으로 한 것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어렵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재만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오랫동안 글을 써왔어요. 모두 다 애착이 있겠지만 특별히 손에 꼽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윤후명 “작가는 모든 작품이 하나의 작품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저 역시 동감하는 이야기예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작품에 저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녹여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죠.

소설 ‘소행성의 분노의 강’에 느낄 수 있듯 선생은 작품에 과거의 기억을 묻어두는 편이다. 이미 선생이 어떤 글에서 밝혔듯 선생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선생의 친부는 경찰로, 6·25 전쟁 발발 즈음 삼팔선 근처에서 벌어진 국지전에서 돌아가셨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마을에 남아 생계를 이어가던 중 군 법무관으로 그 지역을 찾았던 한 남자를 만났다. 그렇게 새아버지는 험난한 시절, 한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 당시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린 아버지는 이등병으로 강등되며 10년 자격 정지를 당했다. 아버지는 이후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데 힘들어했고, 가세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 시절에 경험한 외로움과 공허함은 어린 선생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남겼다. 그 공허를 위로해준 것이 바로 꽃이다.

# 소설가가 사랑한 것, 꽃과 술
이재만 에세이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를 보면 직접 그린 꽃 그림이 여러 점 실려 있더라고요. 그림은 따로 배운 건가요?
윤후명 10년 전 인사동을 지나가다 어떤 화가의 전시회를 관람하게 되었어요. 작품을 구경하다가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 그 화가의 집으로 찾아갔죠. 그런데 화가가 “마음껏 내키는 대로 그려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림을 배우려고 문화센터에도 가봤지만 역시 마음대로 그리는 것이 정답이더군요.
이재만 그림을 보면 주로 꽃이나 새를 많이 그렸더라고요. 식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요.
윤후명 어릴 적부터 식물이나 꽃에 남달리 집착하는 편이었어요. 가까이서 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래서 제 책에도 꽃그림을 그려넣은 것이고요. 꽃을 계속 보고 있으면 아름다움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게 돼요.
이재만 꽃이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죠. 식물의 범주에서 본다면 우리가 누리는 혜택도 적지 않을 텐데요.
윤후명 맞습니다. 우리 인류가 식물에게 빚진 것이 정말 많아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고 있어요. 우리는 다 소비자일 뿐인데 말이죠. 그래서 전 꽃을 보고 있으면 식물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생겨나요.
이재만 식물을 두고 철학선생님이자 인생 스승이라고도 표현했는데요. 특별히 좋아하는 식물이 있나요.
윤후명 좋아하는 식물이 있지만 어느 하나를 지칭하면 식물이 저에게 무어라 원망하지 않을까 싶네요. 예전에 황희 정승도 어느 소가 나은지 비밀로 얘기했잖습니까. 저도 오늘은 오프더레코드로 하겠습니다.
이재만 역사적으로 보면 화가들이 술을 많이 좋아했잖아요. 저도 학창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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